욥기서에서 찾아 본 신정론
지금 다니는 교회에서 내게 처음 설교를 해보라고 권유했을 때, 주저 없이 다루었던 내용이 고통에 대해서였다. 설교를 처음 하던 날 읽었던 성경말씀이 하박국 1장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의 말씀이었다. 선지자는 13절에 왜 하나님은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어도 잠잠하시냐는 질문의 내용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 나아가서는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대변이기도 하며, 믿는 자들에게 오직 축복과 영광만을 생각하게 했던 교회의 모습에 대한 반론이기도 하다.
왜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그렇게도 많이 일어나는가? 왜 무죄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보지도 못하고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가? 어째서 악한 사람들은 번창하고 번영하는데, 정의로운 사람들은 비참함과 압제 속에서 살아가는가? 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사랑이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인간의 고통과 악의 현실에 관한 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 대답을 추구하는 딜레마에 빠진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고통의 문제가 마치 신학교 생활 3년 내내 조직신학에서 배웠던 삼위일체처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로 생각되어 진다.
여기서 또 하나, 선과 악의 기준에서 선은 무엇이며, 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지금 와서 내가 그동안 그렇게 교회에서 기도해서 해결하려고 했던 고통을 악으로만 보았던 것에 대한 의구심으로 선은 좋은 것이고,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며, 건강하며, 잘 살고, 잘 먹고, 풍요로운 것인가? 그 반면에 악은 나쁘고, 불행하고, 서로 미워하며, 병에 걸려 힘들고, 못 살고, 목 먹고, 죽음에 이르고, 고통스러운 것이 악인가? 모든 악이 직접적으로 그 악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실재는 엄청나다. 악의 실재는 통제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으로 나타나며 우리로 하여금 쉽게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어떤 이들은 이 같은 현실 앞에서 삶과 하나님에 대해서 수치와 분노를 맛보기도 하고 절망의 나락에서 허무와 체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성서 말씀의 이면에서도 고통의 소리가 울리며 우리로 하여금 듣게 한다. 다시금 주의해서 성서에 깔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바로 그런 똑같은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성서는 찬양의 노래만큼이나 아픔과 통곡으로도 가득 차 있는 듯이 보인다. 히브리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애와 재앙, 질병과 패전, 재난 등이 거대한 애통과 비탄이 되어 나타난다.
그런 고통의 소리는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데, 출애굽기 2장 23절 이하에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히브리 노예들은 창조자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을 해방시켜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리고 자유를 얻은 후에는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방패가 되어 달라고 울부짖는다. 시편에서는 확신에 넘친 찬양과 절망적인 고통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고통은 직면해야 할 실재이며 저항하고 울부짖고 씨름해야하는 그리고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극복해야할 실제였다.
가나안의 종교들은 신들의 분쟁과 긴장을 기초로 하여 고통과 악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것은 세상에 실재하는 악의 문제를 이원론적으로 해결하려는 방법들 중 하나로, 사람들로 하여금 고통의 시기를 악한 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번영의 시기는 선한 신들로부터 오는 선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가나안의 죽음의 신인 못(Mot)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을 표상하게 되었고, 바알(Baal)은 그의 부인인 아스타르테(Astarte)와 함께 생명과 기쁨의 원천으로 숭앙받게 되었다.
이러한 구분이 사물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보는 방식으로 보였으나, 이와 같은 이원론적인 시각은 고통과 악의 딜레마를 푸는 열쇠처럼 보인다. 이원론은 악의 근거를 자연의 영역 밖에 두고 사람들이 스스로를 신들의 변덕이나 우주적 운명에 맡겨 버릴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런 사유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피해 갈 수 있는 편리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원론적 접근은 오랜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 왔다. 아마도 이 땅위에 사는 수백만의 신앙인(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들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고통의 신비를 이러한 이원론적 신학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은 히브리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 방안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多神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한 분 야훼 하나님께 기초하고 있다.
이원론적 시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신앙의 난제는 하찮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적인 신앙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웃 나라들의 세속적인 신앙 관습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원론에서는 신의 전능함이 손상되고 이신론에서는 신이 불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면서 선함을 보장할 수 없게 되는데, 이에 대해 신의 선함과 전능함 양자를 확보하면서 악의 현실성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는 방법은 악이란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자기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라고 보는 것이다.
즉, 선하고 전능한 신이 선한 뜻을 완성하기 위해 악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악이라고 해도 결국은 선에 봉사하는 것으로서, 성경의 욥기서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욥기서는 의인을 고난으로 이끌었던 악의 배후에는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통의 의미와 고통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씨름하면서 고통이 생겨나는 여러 중간 이유들을 찾아내었다. 욥기도 아마 그 중에 하나일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대체로 악과 인간의 슬픔에 대한 설명은 세대를 두고 히브리인들에게 전해 내려온 보편적인 지혜에 뿌리를 두고 있다.
크렌쇼, 제임스 L. 은 욥기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였다.
욥기는 설화의 틀 속에 삽입된 시적인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산문 부분과 시 부분 사이에 상당한 긴장이 있다. 고 한다.
설화부분(1:1-2:13)은 욥의 경건이 외적인 조건들의 형통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단의 냉소적인 판단으로 고대 종교의 핵심에 속한다.
머리말(1:1-2:10)에서 5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데, 첫째, 도입(1:1-5)은 전설적인 영웅들이 세상에 살던 과거의 이야기, 둘째, 천상회의(1:6-12)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회의와 사단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도 욥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실한 종에게 관심을 유도하면서, 욥의 네 가지 덕목(흠 없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함)을 가르쳐준다. 셋째, 지상(1:13-21)에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이 넘치는 지상의 장면과 특정구절을 반복하며 사단의 활동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넷째, 천상(2:1-6)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또 다른 모임이 열리는 하늘로 다시 무대를 옮기며,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는 자신의 생각을 믿는 사단의 태도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섯째, 사단이 하나님 앞을 떠남(2:7-10이하)고 욥은 자신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때에 어리석은 말을 퍼붓는 자기 아내를 교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욥기 2:11-13은 욥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3장 이하(3:1-41:34)와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후기(42:7-17)는 하나님의 종 욥이 다시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음을 밝히면서 그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기까지의 삶을 조금씩 정리해 간다.
신학적 관점에서 외견상 비도덕적인 듯한 하나님에 의해 생겨난 불협화음이, 욥의 순전함을 믿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두 질문으로 서론 부분은 인간 실존에 관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경건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무죄한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이다.
시적인 대화(3:1-41:34)로 욥의 탄식은 저주로 시작해서 저주로 끝난다. 그러나 그 저주는 하나님께 대한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저주(3장)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문제 삼는다. 마지막 저주(29-31장)는 하나님의 무죄 선언을 받아내려는 욥의 노력을 대변한다. 욥의 두 저주 사이에는 욥과 그의 세 친구들(엘리바스, 빌닷, 소발) 사이의 대화가 나타난다.
엘리바스의 말(4-5, 15, 22장)의 두 가지 주장은 “무죄한 자는 결코 멸망당하는 법이 없고 오직 악한 자들만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도덕성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빌닷에 의하면(8, 18, 25) 충분한 심판의 수단들은 악을 완전히 제거할 것이며 악의 결과를 가차 없이 박멸할 것이다.
소발(11, 20, 27:11-13)은 운명에 관심 하면서, 악한 자들은 일시적으로 번영을 누리지만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먹은 음식은 몸 안에서 곧 독으로 변한다.
욥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께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견해에 근접하지만 악한 자들의 운명에 관해서는 친구들과 차이점을 보인다.(6, 9, 12, 16, 19, 21, 23, 26, 27장)
상상으로 조작된 자신의 죄가 어떻게 하나님께 해를 줄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와 죄인들을 똑같이 파멸시킨다는 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의 덕성이 그 정당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욥의 고통스러운 깨달음은 도덕성 자체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
만일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악한 자로 보신다면 도대체 선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아벨의 고통과 같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소원 안에는 악한 자의 잘못이 드러날 때까지는 무죄한 피가 하늘에 부르짖는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욥의 탄식은 역설로 가득 찬 기이한 상황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그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감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감추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한다.(욥 23:3-4, 8-9)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그는 하나님의 무죄 선언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폭풍우 속에서의 하나님의 두 말씀은 욥을 침묵하게 만든다.(38:1-41:34) 첫 번째 말씀은 자연의 신비스러움을 찬양한다. 두 번째 말씀은 욥이 하나님을 공격하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시인한다. 그 결과 두 하나님의 말씀은 애매한 고난과 하나님의 불공평함이라는 문제에 대해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여 진다. 욥은 하나님을 찾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대화로 귀결되었음을 알고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구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욥은 전혀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42:1-6)
욥기의 주제는 그의 삶이 직면하고 있는 영적인 위기가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의 한 결정적인 단계를 대표하고 있다. 선행은 보상을 받고 악은 징계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러나 우연한 불행과 대속의 고난은 보응의 교리밖에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당부하는 말은 그의 자비가 엄격한 공의의 요구조건들을 초월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온전한 진리는 어느 한 극단에 있지 않다. 는 것이다.
욥이나 그의 친구들이 제각기 이제까지 소중하게 간직해 온 신앙을 버리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은 욥을 개인적으로 비방하는 쪽으로 기울어 질 수밖에 없다. 욥의 비참한 상황은 “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고통 받게 하시는가?” 란 사변적이고도 자기중심적인 질문을 곧 사라지게 만들며, “왜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러한 불공평함을 겪게 만드는가?”라는 대담한 질문을 하게 한다. 진정한 문제의 근원은 고통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은 욥이 당하는 고통의 깊이가 어떠한가를 알게 해준다.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욥은 하나님의 침묵을 압도함으로써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배운 것은,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려는 지나친 열심이 하나님과의 대면에서 무가치한 것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욥을 자신과의 대화에서 그를 침묵시킴으로써, 우주가 합리적인 원리를 따라 운행된다고 보는 생각 즉 잠언사상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의도하는 것과 늘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절망적인 고난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사이의 모순 된 관계가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과의 적대관계에서의 하소연 혹은 탄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은 곧 구원자임을 고백한다. 인간의 한계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선한 대로 인도 하신다. 욥은 창조의 신비에 비추어 볼 때 자기의 존재가 보잘것없다는 것과 다시는 자기주장을 내 세우지 않을 것을 고백한다.(42:1-6) 욥은 자기의 고통에 대한 설명은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을 초월하신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의 고난문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혹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드러낸다.
욥의 이야기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성서의 고전적 형태이다. 욥기는 이미 1장과 2장에서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독자들로 하여금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어느 정도 고통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즉 거듭되는 이야기 이지만 고통의 신비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욥기에서 나탄 난 욥의 고통을 다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해 보면, 욥기는 우선 신실하고 번창 했던 한 의인의 삶이 부서져 가는 과정을 산문체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이 불행의 한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시험해 보도록 허락한다. 이어지는 본론 부분은 욥과 그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해 논쟁하는 대화체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욥기의 저자는 이 땅에서의 응보를 가르치는 전통적인 논제를 세 친구의 입을 통해 설명한다. 세 친구의 논지는 선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악의 현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악한 자가 누리는 행복은 잠시 뿐이다. 둘째, 선한 이의 고통은 그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셋째, 의로운 이의 고통은 무지나 약함 때문에 저지른 실수에 대한 벌이다.
따라서 결론은 아주 단순하다. 만일 욥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욥이 자신의 무죄를 항변하자 세 친구는 더욱 완강한 태도를 취한다. 세 번의 순환적인 대화가 끝난 후 제3의 인물인 엘리후가 나타나서 전통적인 논제를 더욱 발전시킨다.
그러는 동안에 욥은 자신의 경험을 곰곰이 되새긴다. 그리고 깊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욥은 자신이 살아 온 의로운 삶과 세상에 산재해 있는 불의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전통적인 이론에 항변한다. 그는 질문을 던져 놓고 하나님을 향해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응답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배웠던 대로 天上에서 고통 받는 자에 대해 어떤 회의가 열리고 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세 친구를 꾸짖고, 욥에게 자녀와 소유물을 두 배나 더하는 축복으로 보상한다는 내용의 산문으로 끝맺는다.
욥기의 핵심은 욥이 하나님을 만났고 고통의 신비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욥기의 메시지는 매우 단순하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계시의 역사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욥기의 저자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인 것 같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한 편지에서, 인간의 질문은 해결이 아니라 저 너머에 있는 신비 자체에로 인도함을 암시하면서 질문하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쓰고 있다. 고통의 문제는 일반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전통적인 잠언들이 그들의 경험과 상응되지 않음도 인식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해답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깊은 차원에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고통의 역설과 대면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욥의 역할인 것 같다. 고통에 대한 욥의 대답은 “고통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질문 너머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뢰와 신앙이 해결은 아니다. 그것들은 새로운 관계와 여정을 향한 초대이다. 신뢰와 신앙은 ‘질문의 삶을 살라는 도전이며, 삶의 질문과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의미를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고통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초대로 보여 진다.
이와 같은 신정론이 가진 문제점은 신의 선함이 여전히 확실하게 증명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적당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조직폭력배를 수하로 둔 경찰을 선한 경찰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직접 고난을 주지 못하고 악한 실체의 의존해서만 고난을 줄 수 있는 신이라면 전능성조차도 회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욥기에서 나오는 신정론적 입장도 결국은 교훈적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조금 다른 점이 있어서 별도로 나누어 보면, 이 입장은 신이 악한 세력을 부려서 악과 고통을 행사하는 것이든, 신이 직접 고난을 주는 주체이든, 그 목적은 그 고난과 악한 현실을 통해서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극단적인 악의 현실성에서도 신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게 되고, 고난에 처한 인간은 그 고난을 통해서 신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을 배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가르치기 위해서 굳이 고난과 악이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즉, 다른 선한 방법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가라는 의문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학교를 생각해 보면 체벌을 통해서만 교육이 된다고 하는 선생님이, 체벌이 없다면 배울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당장의 효과는 높을 수 있을지 몰라도, 보다 시간을 들여 긍정적인 방식으로도 교육은 가능할 것이고, 또 그런 체벌은 심리적 정서적 상처를 주어 폭력을 정당화하는 잘 못된 가치관을 갖게도 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본다.
즉, 다시 신은 선 한가 ? 신은 전능 한가 ?라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마는 신비 속에 빠져 들게 된다.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선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일인가? 특히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는 목회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선한 것인가를 판단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성서의 전도서 기자 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전 2:3).
지혜의 교과서라고 부르는 성서의 잠언서는 선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말한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 11:27),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잠 12:2) 그러나 성서의 욥은 “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느냐?”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다. 전도서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선한 것과 악한 것이 별로 차이가 없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 9:2)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매 일반이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다 똑같다고 한다면, 세상에 선한 기준이 어디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는 전도서 기자의 의도를 살펴보았다.
솔로몬은 세상의 지식과 명예와 부를 한 손에 쥐고 한평생을 살아보았던 자로 적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볼 때 배부른 사람이다. 지식이 별 것 아니며, 명예도 별것이 아니며, 돈도 그렇게 매력적인 것이 못되며 모든 것이 그렇고 그런 헛된 것이라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가 상당한 수준의 염세주의자로 보인다. 그러나 전도자는 단순한 비관자는 결코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의 기본적 의도는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처음 설교하던 하박국의 말씀처럼 하박국의 질문에 하나님은 하박국 2장 3절에 묵시는 정한 때가 있어서 그 때가 되면 악을 행하는 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할 수 있는 그 “때”에 대한 그의 믿음은 매우 분명해 보인다.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선과 악도 그 때가 있다는 말이 된다. 전도자가 선과 악이 매 일반이라고 말하는 전도자의 의도가 여기서 드러난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 항상 악한 일이라고 좌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도자가 말했듯이 고통스러운 일이 언제 선한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전도자는 우리가 하는 일에 심사숙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전도서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의 일이 결국 선하신 분 하나님의 판단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우리는 열심히 일하되 그 일이 모두 정당하고 흠이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할 일을 다 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고난 받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나는 고난 받는 자들에게는 남들이 결코 동참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이러한 자들에게 깊은 배려와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의만 강조하여 악의 결과를 그 사람에게 돌리는 식의 해답은 이제 배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한결같은 소리를 하게 되는 현대교회가 지속된다면 진정한 아픔을 가진 자들이 위로를 얻을 것이 사라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소리만이 계속되는 가운데서 고난 받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대결만이 참 길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고 목회자는 이들의 고통을 결코 덜어줄 수 없다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을 위하여 서있는 것일까?
교회와 목회자가 어느 고난 받는 자에게 줄 수 있는 정해진 해답은 없다. 그러나 그 고난 받는 자들의 고난을 진정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그들의 억울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떠한 공격의 비수를 갖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단편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 고난 받는 자를 더 힘겹게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다양하심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고난에 닥친 자들을 만났을 때 그 문제를 성급히 풀려고 하는 것보다는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의 처방으로 생각하고 고난 받는 자를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하리라고 본다.
'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란 무엇인가? 고민.... (0) | 2006.10.23 |
---|---|
[스크랩] 웨슬리의 관용정신 (0) | 2006.10.21 |
[스크랩] 파워포인트 목회 자료실 (0) | 2006.06.20 |
[스크랩] 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켐피스 작품중에서 (0) | 2006.06.02 |
삼위일체론 (0) | 2006.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