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는 원래 죄악덩어리였습니다.
나는 원래 죄악덩어리였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와 참된 생명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메시야를 갈망하고 오시기만을 소원했습니다.
예수님이전의 구약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는게 참된신앙이었다면
예수님이후의 신약의 사람들은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는게 참된신앙이었습니다.
이 메시야가 바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있어서 메시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도 그러한 자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로 늘 육신을 통해 원치않는 온갖 죄악들이(살인,간음,음란,도적질,....)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이로인해 말할수 없는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우리 육신의 행위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잘하던 못하던 전부 죄악된 행위임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는 모두 사단이 심어논 선과 악의 기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나타나는 모든 행위의 중심에는 힘들어도 자기자신의 옳다고 여겨지는 의와 선한일을 행하는것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비록 악할지라도 나와 내가족 내형제를 위한 삶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본능적으로 범죄를 행하기도 하는 이기적 행위가 흘러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운 선을 행하든 혹은 손가락질 받는 악을 행하든 그 사람들의 드러난 행위를 통해 좋은일은 기쁨을 얻기도하고 나쁜일들은 죄에대한 경멸로 돌을 던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게 되면 이러한 기준은 근본적으로 완전한 차이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기준에서 보게되면 이는 모두 다 타락된 인간의 죄악된 성품에서 나온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선을 행하든 어떠한 악을 행하든 모두 다 더럽고 죄악된 행위로 여길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든 사람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한가지를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 한가지란 바로 내 마음을 버리고 포기해야 하는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모두 부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선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악하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세상 어느 한사람도 하나님기준에 맞는 의로운 자가 없다는 뜻이 되고 마는것입니다.
그래서 죄로인해 모든 사람이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선언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느 한사람도 하나님기준에 완벽하게 살아 의롭게 되어 죽음을 보지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는 뜻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너무도 놀랍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말씀앞에 다가섰을때 첫번째로 듣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한다는 따뜻한 사랑의 말씀도 아니요 옳게 바르게 살아라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을수 밖에 없는 존재를 듣게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택함을 받고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받는자는 이런 자가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죽기까지 주님을 위해 순종하였고 말씀대로 의롭고 선하게 살았으며, 하지말라는 것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라고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받는 자녀는 바로 이런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전부 다 악합니다.
나는 죄악중에 태어났으며 죄악덩어리로 태어났습니다.
머리끝에서 부터 발끝까지 저는 죄로 뒤덮인자입니다."
라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죄인임을 발견하는 단계)
이러한 죄인됨을 정확히 고백하는자는 그때부터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게 되며 주님의 성령의 은혜와 위로가 임하기 까지는 각 사람들은 나의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주님을 의지하며 불쌍히 여김을 바라는 간구를(기도를) 하게됩니다.(회개의 단계)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주님을 만나기전 죄가 진정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죄값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나 복음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가 살아온 모든 전생애가 죄악된 생활인것을 알았고 우리의 근본이 죄악덩어리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나는 지옥으로 가서 고통 당할수 밖에 없는 자임을 복음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려졌던 나의 죄가 이죄로 하여금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될지 전혀 몰랐던 내가 이제 주님의 이 복음의 말씀으로 하여금 숨겨졌던 나의 모든 죄가 엄청나게 크고 무서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알기전 이죄는 내안의 자아로 하여금 드러나지 않고 가려졌습니다.
그래서 형편대로 열심히 살아오고 나름대로 옳게 살아왔다고 하였으나, 늘 내 마음은 은밀한 죄의 유혹에 항상 더불어 살아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주의 복음을 통해 보이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했던 이죄의 공포가 내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이 죄가 우리를 짓눌려 지옥의 문앞까지 가게하는 영적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죄앞에서 육신으로서는 피할수 없는 연약하고 무력한 자임을 알게되었습니다.
두려워 떨었습니다.
지금껏 나는 사단이 심어논 인간중심의 타락한 의지에 길들여 살아온 세상법아래 매인 자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지금껏 살아온 선악의 행위와 상관없이 나는 날때부터 죄악의 덩어리였으며 사단의 종노릇 하는 자였었고 이로인해 지옥행을 예비한 자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무섭고 두려워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지만 사단은 그럴때 마다 더 강하게 나에게 달라붙어서 이러한 죄악에서 벗어날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유혹을 통하여 이 죄와 더불어 결탁하도록 육체적 퀘락과 만족을 느끼게 하고 갈급함을 느낄수 있도록 더 엄청난 유혹과 자극을 통해 넘어뜨리는것을 봅니다.
아무리 외치고 벗어날려고 애를써도 사단은 연약한 인간의 양심을 이용하여 네가 한짓을 다 알고 있다고 조롱하며 마음의 고통과 수치와 괴로움을 주어 더욱더 주님께 멀어지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벗어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벗어날수 없는 완전한 절망감이 엄습해올때
예수그리스도는 놀랍게도 이러한 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자신이 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란것을 아는 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렇지 않다라고 하시며 죄로인해 떨고 있는 우리에게 새언약의 법을 내려주시며 새언약의 법을 통해 주안에 거하는 자는 우리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거룩하고 의롭게 보셔서 죄와 사망에서 자유케 되는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 후 죄사함을 받아 의롭게 된 우리에게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어지는 열매맺는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껏 우리는 우리마음을 다스려 올바른 마음으로 양심을 지키며 윤리와 도덕속에 바르게 살아오면 된다고 믿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철학과 도덕을 통해 아름다운 인간상을 구축해 갈려고 애를 썼습니다.
세상법과 교육 아래서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성을 알게되어 선악을 통한 참된 인간상을 가질려고 애를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세계 아래서는 근본 사단의 심어논 선악에 나온것이니 만큼 그 어떤것도 다 더럽고 추하며 무익할뿐이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의 행위를 가지고 자랑할것도 없고 내세울것도 없습니다.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내가 주님을 믿고도 나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거나 혹은 자랑할것이 있다거나 혹은 미련을 가지는 아쉬움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무가치 하게 여기며 나의 의가 살아있는 어리섞은 모습이 될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노력해서 고칠수 있거나 개선 가능성이 있는 모습은 0.1%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뭔가를 노력해서 열심히 살아갈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기특하게 여기시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모든것은 다 더럽고 추하게 여기시며 이런 육신의 자리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라고 명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주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주와 함께 못박힌자는 죽음안에 갇힌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과 행위에 대한 결정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나의 죄와 허물을 알아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의 육체와 그정은 모두 다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박혔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자들은 말할수도 행동할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안에서 주와 함께 죽은자이기때문에 자기 행위에 대해서 노력해야 할 이유와 책임질 이유가 전혀없기에 따라서 내행위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심판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어 죄사함받아 의롭게 되어 그 이후 주안에서 의롭고 선한일을 행하였다고 해보십시다.
누가 했습니까?
만약 우리가 했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구원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믿을때 분명히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자들의 형편은 어떻습니다.
이들은 말할수도 행할수도 없는 고통속에 신음하는 죽음의 감금상태인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선한일을 했다고 한다면 십자가의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기에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한일을 누가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선한일은 내가 혹은 우리가 행한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내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이(혹은 영이) 의로운일을 행한것이 되었기에 자신은 자랑할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그 정과 욕심을 죽였기 때문에 이후의 모든 일들은 내가 한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한것입니다.
주를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나는 회개와 영접이후 예수님의 도구로서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이후 나는 예수님안에서만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일뿐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주를 믿는 자가 범죄를 행하였다고 해보십시다.
나는 이미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나로 통해 나타나는 이 범죄도 나하고는 아무상관도 없습니까?
예.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나로 통해 나타나는 이 범죄는 그 책임이 내가 아니면 누구 책임입니까?
여기에서는 육신으로 범한 죄값을 감당해야 할 부분과, 그 범죄를 불러 일으킨 실제적인 세력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믿는자가 또다시 범죄에 빠져서 육신으로 범한 죄값을 감당해야 할 부분도 주님이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죄는 우리가 믿기전 범한 행위죄만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사단의 종노릇 하는 근본 죄악덩어리임을 알고 내가 살아온 날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나의 모든 전생애가 죄로 되어졌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할때 우리 주님께서 이미 이천년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의 전생애를 다 책임지신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가 생명이 다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 죄 지을것을 미리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죄와 허물을 위해 이천년전 갈보리에서 단한번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은 단지 우리죄를 사해주신다는 차원이 아니라 죄의 결박을 끓는 사단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를 시커먼 죄악덩어리에서 흰눈처럼 고운 상태로 의롭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는 차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나서도 나의 육신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가지 모든 범죄도 자신이 갚아야 할 것이 아니고 우리 주님을 통해 이미 다 갚은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발견하여서 나의 죄와 허물을 (심중의 고통과 부끄러움과 눈물로) 자백하며 이런 어리섞은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사해주신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회개가 아닌 자백입니다.
회개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 주님을 믿고 받아들였을때 이루어진 사실이며 자백은 믿고 거듭난자가 또다시 이러한 범죄에 빠질수 밖에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 지을죄도 주님이 이천년전 죄값을 다 갚으셨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더욱 말이 안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화인맞은 행위가 될뿐이며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명히 주안에서 사는 우리가 또다시 범할수 밖에 없는 우리의 모든죄는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값을 치루어 이미 다 용서받은 과거의 일이되고 말았지만
믿고난 이후로도 순간순간 범하는 그 죄를 통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를 믿고 난 이후 다시금 범하여지고 드러나는 모든 죄는 우리가 얼마나 육신이 연약한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 죄를 통하여 넘어질수 밖에 없는 무력한 자기 자신을 보고 끊임없이 주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자세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우리의 전생애가 그 값을 다 치뤘다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난 자유의 기쁨을 갖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남았습니다.
나의 육신을 통해 그 범죄를 불러일으키는 근본 장본인이 누구냐?라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어 새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육신을 통해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내가 죄를 범했다고 고백하십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역시 십자가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입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 철저히 박혀있는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이런자는 전혀 말할수도 움직일수도 없는 죽음의 감금상태에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을 통해서 나타나는 죄와 범죄의 죄값을 우리 주님이 갚아 주셨다고 한다면, 우리 육신을 통해서 또다시 드러나는 그 범죄 역시 우리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단에 의해서 인간중심의 의지를 이용하여 유혹과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은혜의 힘이 사라지게 되어져서 자신의 만족을 위해 육체를 통해서 액션 즉 행동을 하게되고 결국 범죄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사단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어 그 범죄를 미끼로 "네가그 죄를 지었다"고 나의 양심에 고발을 합니다.
그리고 고통을 줍니다.
네가 그러고도 목사, 장로,집사냐 라면서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을 네가 져야 한다면서 스스로 정죄하여 주님으로 부터 멀어지도록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다시금 지은 죄로인해 부끄럽고 슬퍼하고 넘어질수 밖에 없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사단에게 선언해야 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단아 내게서 물러가라
나를 통해 죄를 짓게 만드는 사단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 육신을 통해 죄를 짓는것은 나는 너무도 슬프고 부끄럽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고 바로 사단 너다.
사단 네가 내 안에서 죄를 짓게 하는것 다 알고 있다.
내 생각 내의지 까지 네가 다 교묘하게 숨어들어와 죄짓는 생각과 죄짓는 행동까지 하게 하는것 다 알고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미 주안에서 죽었으니 이후 내 육신을 통해 죄를 짓고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주님을 믿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롬7:15-20)
여러분 이와같이 연약한 육체를 통해 죄의 허물이 나타날수 밖에 없는 주님앞에서의 믿음의 고백과
그렇게 죄의 허물이 나타나도록 교묘하게 죄의 생각과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그 주체자가 사단임을 분명히 알고 선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믿어 죄악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어 거듭난 모든 주의 성도들이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는 죄에대한 단호한 대처법입니다.
그러나 이 고백과 선언 역시 우리가 하는게 아닙니다.
주의 영이 거한자마다 나의 더러운 행위를 일으키는 주체자가 누구인지를 알아 말씀의 능력에 의해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가 그러한 고백을 하도록 이끄십니다.
내 의지와 지식으로 한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범죄하는 악에 있어서는 사단은 얼마나 교활한지 믿는자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양심을 너무도 괴롭게 하기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두려움속에 떨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그러고도 집사,권사,장로냐 네가그러고도목사,전도사냐 ..... 양심으로 부터 이소리를 들을때 너무도 숨이 막혀오고 머리가 무겁고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그저 눈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주의 용서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지만 실상은 사단이 그 죄의 두려운 양심을 일깨워서 이미 우리가 회개를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용서를 바라는 기도를 하게 함으로써 이전에 이루었던 구원의 은혜를 무가치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고 확신에 거한다 하면서도 부지중에 짓는 죄의 공포때문에 이미 예수를 믿어 죄와 사망에서 완전히 벗어난 우리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또다시 사단에 의해 마음을 누르는 양심의 가책을 통해 주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는 기도를 밤새도록 하게되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육신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때가 되면 배고프고 때가되면 잠자고 싶고 때가되면 놀러가고 싶고
심심하면 책을 보고 심심하면 tv를 보고
지겨우면 이상한데 가고 싫증이 나면 되돌아서고,
월세방사면 전세집으로 이사가고 싶고
전세집에 있으면 내집 갖고 싶고.......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충족하기 위한 욕구가 매일같이 일어나지만 형편이 안되어서 참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형편만 되면 얼마든지 자기 만족을 위한 충족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삶속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이충족을 이루기 위한 작은범죄에서 부터 큰 범죄까지 저지르고 사는 모습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선언하면 우리는 모든것에서 자유하고 죄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게 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자입니다........
주님만이 저를 구원하실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저를 벗어나게 하실수 있습니다.
이기도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드러내어서 주님의 긍휼과 은혜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실수와 허물을 쏟을때 주님의 은혜를 잘못받아들여서 그런가 보다 하면서 끝까지 자신이 책임을 지고 말씀대로 열심히 뭔가를 해야만 될줄로 알고 있습니다.
기도할때도 "절대로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습니다. 말씀대로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라고 기도합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어디 그렇게 됩니까? 안됩니다. 절대 안됩니다.
사단은 믿음의 법에 의해 죄가 완전히 청산되어 정리된 신앙을 잊어버리게 하고 순간순간 드러나는 육체의 연약함과 죄를 통해 두려워하는 인간의 약점을 이용해 끊임없이 사단이 심어논 선과악의 행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그 양심에다 "네가 그러고도" 라고 하면서 계속 고발하고 있는것입니다.
여기에서 이길힘은 이것밖에없습니다.
"그래 사단 네말이 맞다.
나는 원래 그런자이다.
육신에 넘어갈수 밖에 없는 그런자이다.
그러나 우리주님은 이런 나를 불쌍히 보셔서 나를 그 피값으로 구원해 주셨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자야 썩물러가라.!!"
내 행위를 선하게 고쳐서 사단을 물러가게 하는것이 아니라 나는 범죄할지라도 주님안에서 사는 나는 죄에서 벗어난 몸이기 때문에 나를 해할 아무권세도 없기때문에 물러가라고 하는것입니다.
이러한 흔들림없는 확고한 신앙을 가질때 그럴때 사단은 더이상 아무소용이 없음을 알고 물러갑니다.
내가 죄악에서 이길려고 애를쓰면 쓸수록 사단은 미소를 지으며 점점 강도를 높혀 "어쭈 그래 잘하는데 그러면 이럴때는 어떡할래!" 하며 마치 조롱하듯이 신앙의 연륜에 따라 유혹의 강도를 높혀 결국은 쓰러뜨립니다.
오늘날 말씀을 맡은 목사님들이나 직분자들이나 거듭난 성도들이 돈에 넘어지고 여자에 넘어지고 권력에 넘어지고 습관적으로 중독된 생활에 넘어지는 것도 바로 이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가 가장 괜찮다고 여겨지는 그 일에 대해서도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갖은 공격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성도가 몸이 약해서 운동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건강을 위해 시작한 운동이 재미가 들어 어느날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운동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열심이 하다보니 남이 알아주고 부러워하는 그 기쁨에 운동을 하다보니 주님을 누리는 시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얼마전 tv에 일흔 중반되는 근육질의 할아버지가 보여주었습니다.
50세때부터 건강을 위해 시작한 보디운동이 점점 근육질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남들이 부러워하니까 언제부터인가 여름에 수영은 안하고 근육질을 드러내며 백사장을 걸어다녔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러워하고 근육을 만지고 하니까 그재미에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이죠
운동자체가 잘못되었다는게 아니라 처음의 가졌던 그 마음에서 어느순간 자신을 드러내놓고 싶은 과시욕과 하지않으면 온몸이 근질거리는 중독성까지 가지게 되는것입니다.
신앙의 나태함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원래부터 악하고 추한자이고 육신에 의해 항상 넘어질수 밖에 없는 자다 그러나 이런나를 위해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구원해 주셨다라는 사실을 선언하면 신기하게도 우리는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평안함과 자유함을 갖게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토록 좋아보이고 이끌려가던 이전의 모든 죄악의 행위들이 어느순간 아무런 느낌이 없어지고 점점 싫어지게 됩니다.
비록 끊임없이 육신이 죄에 대해서 순간순간 무감각하여 세상유혹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일어나 그러한 상황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위와 같은 사실을 알아 주님께 모든것을 맡기고 사단의 장난을 예수이름으로 물리치면 되는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살아갈때 주님은 우리를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이미 영원히 용서한 그 사랑을 통해 또다시 육신에 넘어져 죄를 범한 우리를 긍휼히 보십니다.
그래서 벗겨내지 못한 허물에 대해서는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안타까이 여기셔서 돌이키기를 성령을 통해서 끊임없이 지시하십니다.
우리몸은 우리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내 몸은 내것이 아니라 주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님을 모신 성전이 됩니다.
이후의 모든 행함은 내가 한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나를 통하여 주님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주안에서 죽은 나는 범죄는 더더군다나 내가 짓는게 아닙니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에게 심어논 자기 중심적 생각으로 인해 그후손인 우리도 그대로 유전받아서 생각과 욕구가 섬광처럼 떠올라 내 육신을 통해 사단이 원하는 행동을 할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기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법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모든 선한일은 하나님께만 영광돌릴뿐이고, 나에게 나타나는 모든 악한 범죄들 역시 내가 한것이 아니라 사단네가 그랬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양심의 고통을 즐기는 사단의 장난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이제는 죄를 범하는 것도 내가 범하는 것이 아니요 내안의 죄의 실체인 사단이 내 몸을 이용해서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롬7:20)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자의 몸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이루게 하시듯이
사단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해 자신이 심어논 인간중심적인 자기의를 가지고 충족하고자하는 사람들의 몸을 통해 행악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알기를 바랍니다.
다시한번 결론적으로 전체를 요약합니다.
주님을 믿기전이나 믿고난 후라도 나는 그 어느 누구를 위해서도 내 스스로 움직이고 행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하는것 같아도 그 중심마음 배후에는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나를 움직이고 있는것을 보게됩니다.
이런 나를 아시고 주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새언약의 법이 내안에 들어오게 되었을때 나는 주안에서 죽게되었습니다.
주안에서 죽은나는 그 이후로도 나의 목적을 위한 충족을 위해서도 내가 할수 있는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부 죄악덩어리입니다.
믿는자가 선한일에 대해서는 주님이 한것으로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린다면
믿는자가 범죄하는 악에 대해서도 내 의지를 이용해 사단이 한것으로 분명히 선언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때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되고 선한일에 대해서는 내가 아닌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다.
"주님 선한일을 내가 한것이 아니요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께 영광돌립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역시 내가 한것이 아니라 사단이 한것입니다.
너무너무 부끄럽습니다.
이처럼 나는 그저 이끌림을 받아 행할수 밖에 없는 도구일뿐입니다.
이 더럽고 깨진 무익한 도구가 주님의 십자가의 피로 씻겨 주시고 회복하게 하셔서 주님의 은혜의 도구로만 쓰일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