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교회란 무엇인가? 고민....

undertree 2006. 10. 23. 07:14
 

Ⅱ. 교회의 어원적 고찰


  교회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머릿속에 흔히 연상되어지는 것은, 교회라는 진정한 개념에서 많이 벗어난 획일적이고 단편적인 모습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기에 앞서, 교회의 어원을 찾아 살펴보는 것이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어의 church와 동의어인 스코틀랜드어 kirk는 “주님의 집”을 의미하는 헬라어 형용사 키리아코스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영어의 church라는 말이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건물․ 회중․ 교파 등으로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보통 영국 사람에게 “교회”는 길거리에 있는 건물이나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에 불과하다.

  몇몇 유럽어들은 에클레시아에서 직접 유래된 단어를 사용하는데, 불어인 “에글리즈”eglise)와 웨일즈어인 “에글뤼즈”eglwys)를 들 수 있다. 필리핀어 “에그레지아”(egregia)와 인도네시아어 “게레쟈”(geredja)에서 유럽어의 영향을 받은 파생어를 발견할 수 있다. 독일어에는 “키르케”(kirche)와 “게마인데”라는 말을 진짜 신자들의 참된 교회를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던 것 같다.

  비록 발음은 “교까이”(일본어), “교회”(한국어), “짜회”(광동어)로 다르긴 하지만 일본과 한국 및 중국에서도 같은 한자어 敎會가 사용되는데, 이 세 언어는 모두 “가르치는 모임”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의 고유문화인 유교 사상에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것은 교회가 지적인 모임이요 전문적인 종교 지도자에 의해 가르침을 받는 성인 교육단체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 결과 평신도들을 방관자와 추종자 계급으로 분류했으며 교회의 성장과 교회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방해해 왔다.1)


  교회의 어원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사이에 있는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고려할 때, 신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약의 용어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교회의 개념의 의미는 두 가지 배경, 즉 고전 헬라어의 배경과 구약성경의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고전 헬라어에서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는 일찍이 헤로도투스(Herodotus), 투키디데스(Thucydides), 크세노푼(Xenophon), 플라토(Plato), 그리고 유리피데스(Euripides) 등 약 기원전 5세기의 저술에서부터 발견되는데, 그것은 폴리스(도시)의 시민들의 집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집회는 빈번하게 소집되었는데, 아테네의 경우에는 일 년에 30-40회 정도 소집되었다. 그러한 에클레시아는 어떤 특정한 안건들에 국한해서만 소집되었으며,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안건들에 대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 혹은 집회를 가리키는데, 그러한 의미의 용례를 사도행전 19:32, 39, 4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고전 헬라어에서 세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나타나는데, 종교적인 교제 및 제의(祭儀)적인 단체에 관해 사용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있어서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업무상의 모임(business)이지 연합(union) 그 자체는 아니다.2)



  1. 구약성서의 개념


  구약은 교회를 표현하기 위해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즉 “부르다”를 의미하는 폐쇄된 어근 「칼」(ל󰙍)에서 비롯된「카할」(ל󰕗󰙌)과 “지정하다” 또는 “지정된 장소에 모이거나 만나다”를 의미하는 「야아드」(ך󰘪󰖷)에서 비롯된「에다」(ה󰕉ע)이다.3)


  1). 카할(ל󰕗󰙌 - 회중, 집회)

  구약성서의 희랍어 번역인 70인 역(Septuaginta)은 “에클라시아”라는 단어를 100번 사용하는데, 카할은 본래 종교적 단어가 아니라 일반적, 세속적 의미의 “모임, 모인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다. 예를 들어 시편 26:5의 “행악자의 집회”를 “행악자들의 카할”이라 부르는데, 이때 카할은 아무런 종교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선택하였고 그들과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을 kahal Jahwe(여호와의 총회)라 부른다. 따라서 카할은 “하나님의 계약 공동체”, “하나님의 공동체”를 뜻한다.4)  카할은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슈러(Schuerer)는 후기 유대교는 이미 경험적 실재로서의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키는 Synagogue와 이상적으로 고려된 그 회중의 명칭으로서의 에클레시아를 구별 지었다고 하였다.5)

   이스라엘과 신약교회의 연속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카할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일종의 전문용어가 되었으며 그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종종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6)


  2). 에다(ה󰕇󰘠)

  에다는 야아드(ד󰘞󰖷), 곧 “정하다”, “모이다”, “택하다”로부터 파생된 여성 명사이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12:3에 최초로 나오며, 구약에서는 145회나 나오고 70인 역에서는 127회가 Synagogue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는 벌 떼(사14:8)와 수소의 무리(시68:30) 등을 가리키는가 하면, 의인의 회중(시1:5)을 가리키며, 악인들(시22:16) 또는 강포한 자들(시86:14) 그리고 경건치 못한 자들(욥15:34)의 회중을 가리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고라의 추종자들(민16:5), 아비람의 추종자들(시106:17-18)을 나타내는가 하면, 심판할 때에 하나님 앞에 모일 사람들의 회합(시7:7)을 가리키기도 한다. 반면에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모임(시82:1)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키는 에다의 용법은 구약에서는 매우 특징적인 것이다.

  회중이라는 말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및 여호수아에서 70회나 나온다. 또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회중”(민27:17; 민31:16; 수22:16-17), “이스라엘의 회중”(출12:3; 수22:20), “모든 회중”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또한 “이스라엘의 회중의 모임”(출12:6)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의 모임”(민14:5)이라는 문구도 있다. 에다는 출애굽기 12:3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이스라엘의 회중”이 생겨난 것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애굽을 떠나라는 명령에서부터였음을 암시하고 있다.7)

  에다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여호수아에서 훨씬 더 공통적인 단어지만, 신명기에는 전혀 없으며 후기 책들에서 드물게 찾아 볼 수 있다. Synagogue는 70인 역에서 “에다”에 대한 통상적이고 거의 보편적인 역어이며, 역시 모세오경에서 “카할”의 통상적인 역어이다.8)

  로타르 퀘넨(Lothar Coenen)은 이상의 두 가지 히브리어 용어의 차이점에 대해 약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그러한 두 히브리어 단어들을 같은 문맥 안에서 함께 사용된 구절들(예를 들면, 출12:1ff.; 16:1ff.; 민14:1ff.; 20:1ff.; 왕상12:1ff.)을 통해 비교해 보면, 대체로 에다가 의식적인 공동체(ceremonial community)에 대한 용어로서 항구적이고 덜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편, 카알은 언약에서 비롯된 모임, 즉 시내산 공동체에 대한 의식적 표현((ceremonial expression)이며, 또한 신명기적 의미에서 볼 때, 시내산 공동체의 현재적 형태에 대한 의식적 표현이다. 그것은 또한 세속적인 일(민10:7; 왕상12:3)이나 종교적인 일(시22:26)로 모이는 백성들의 정례 모임뿐만 아니라, 모인 무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민14:5; 17:12)


  히브리 용어들을 번역하기 위해 70인 역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들을 살펴보면 에클레시아는 카할을 대신하는 용어로는 자주 사용되었으나, 에다를 대신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에다는 보통 Synagogue(회당)라는 단어로 번역되었는데, 이 단어는 카할을 번역할 때도 또한 사용되었다. 이 중에서 우리가 신약성경의 교회 개념을 이해하려 할 때 주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바로 에클레시아이다.9)




2. 신약성서의 개념


  신약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헬라어의 배경과 구약의 용어를 먼저 살펴보았다. 신약도 역시 70인 역에서 유래된 두 개의 단어들을 가지고 있는데, 즉 에클레시아와 Synagogue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단어나 나타난 교회의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Synagogue(회당)

    이 낱말은 ‘쉰’(συν-함께)과 전치사 ‘아고’(αγω-인도하다, 오다)라는 동사의 합성어이다. 그리하여 “함께 인도하다”, “함께 오다”라는 어원상의 의를 가지고 있다. 이 낱말은 우리말 성경에서 “회당”으로 번역하였다. 이 말은 전적으로 유대인의 종교적 집합이나 혹은 공예배를 위하여 모인 건물을 지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10)

  구약 성경에서 “회당”은 시편74:8에만 나온다.(AV ‘회당’ : RSV '만남의 장소’) 이것은 모에드(ד󰘠וֹמ)의 번역이다. 이 언급이 현재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헬라어 Synagogue는 70인 역에 이스라엘의 집회를 나타내어 자주 사용되고 신약성경에는 56회 나온다. 기본적인 의미가 만남의 장소이므로 유대인의 예배 장소를 나타내게 되었다. 성경에서의 모임은 예배나 단체행동을 위하여 어떤 지역의 사람들의 모임을 나타낸다.(눅12:11: 21:12) 이 단어는 이러한 집회들의 열리는 건물을 나타내게 되었다.11)

  회당은 예배, 교육 그리고 공동체의 공적 생활 관리라는 삼중의 목적에 기여했다. 그 지역의 법에 순종하는 한편 회당은 자체의 통치권을 갖고 있었다. 회중은 구성원들을 훈육하고 처벌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졌고, 최고 관리회는 회당장이었다.(막5:22: 행13:15; 18:8) 그는 예배가 전통에 따라 수행되는지를 감독했다. 수행원(눅4:20)은 낭독한 성경 두루마리를 가져왔다가 다시 법궤에 가져다 두고, 채찍질로 죄를 범한 회원들을 처벌하고, 어린이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다. 페리츠(Peritz)는 회당 집회의 첫째 기능은 일반을 위한 평이한  율법 교육이었다라고 말했다.12)


2).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이 말은 70인 역에서 이스라엘의 집회를 나타내어 자주 사용되고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 가운데 자주 사용되는 말이 “에클레시아” 이다.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말은 “부르다”(to call)를 뜻하는 칼레오(καλεω)에서 유래한 에크-칼레오(εκ-καλεω)에서 파생되었는데, 에크(εκ)는 “…으로부터”라는 전치사요 칼레오(καλεω)는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동사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으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13)

  에클레시아는 마태복음 16:18, 18:17을 제외하고는 복음서에서 사용되지 않으며, 디도서, 디모데후서, 유다서, 요한 1,2서, 베드로 전 후서에서도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과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 있어서 이 단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4)

  (1) 에클레시아는 구약성서의 카할을, 가리키는 단어로 카할은 세계의 모든 민족들로부터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면,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이라 말할 수 있다. 에클레시아는 그러므로 “불려나온 사람들”이고 이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집회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수시로 일어나는 임의의 집회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선택한 사람들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모임이다. 모임이라는 말이 그렇듯이 에클레시아는 실지로 모이는 과정과 모이는 단체를 동시에 의미한다.15)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다면 교회로서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교회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세상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나 편의를 위하여 생겨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셔서 창조하신 단체이다.

  마이클 그리피스(Michael Griffiths)는 에클레시아의 개념의 함축적인 의미가 풍부하여 이스라엘 회중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몇 가지 측면을 주목하였다:


  첫째, 그들은 불러내어졌다(called out). 이것은 구출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우르 시(市)로부터 부름 받은 아브라함과, 애굽과 이후에 바벨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부르심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의미한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부름을 받았다(called out). 이 개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아들과 교제하도록 부름심을 입었는데”(고전1:9) 이것은 우리의 미래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현재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의미하기도 하다.

  셋째, 그들은 장래의 유업을 얻도록 부름을 받았다(called out). 그들에게 유업이란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곳은 바로 천국이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개념은 성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입었다(히3:1). 바울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대해 말하고(빌3:14), 디모데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 그대는 이것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소.”라고 격려한다(딤전6:12).

  넷째, 그들은 하나님 소유의 특별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함께 부름을 받았다(called out).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을 때 모래와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약속받았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가 애굽에서 인도해낸 백성들을 통하여 위대한 나라를 삼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지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 회중, 즉 “하나님의 백성”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이 에클레시아라는 말 속에는 이 모든 심오하고 풍부한 의미가 들어 있다.16)


  (2)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Berufung)을 받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인 동시에 이 세상 안으로  하나님의 보내심(Sendung)을 받는 공동체이다. 이것을 성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본향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새 땅으로 “들어간다”(창12:1 이하).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계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신발을 벗는다. 이로써 그는 속된 “세상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속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속된 “세상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킨다.(출3:1 이하) 이사야는 성전에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이로써 그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으로부터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구별된 자”로서 입술이 더러운 백성 안으로 보내심을 받는다.(사6:1 이하)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부터 구별되는 “하나님의 아들” 이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이 세상 안데 들어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완성한다. 이와 같이 “세상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아 구별되는 동시에 “세상 안으로” 파송을 받는 여기에 “교회의 기본 구조”가 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의 구별”과 “세상 안으로의 파송”의 긴장관계 속에 있다.17)


  (3) 교회는 “하나님에 의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아들과 그의 영을 통하여 부르신 사람들로 형성된 것이다. 물론 개인의 결단과 성령 가운데서 일어나는 그의 부름심이 개인의 믿음을 가능케 하고 교회를 구성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con-vocatio Dei)인 동시에 신도들의 모임)(congregatio fidelium)이요, 오직 하나님의 기관(institutio Dei)인 동시에 믿는 사람들의 사귐(communio sanctorum)이다.18)


  (4)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의 공동체”를 뜻한다. 하나님의 통치의 능력은 교회 안에서 역사한다. 이것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 관계없이 나란히 병립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도리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기다리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19)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묵시사상가들이 기다리던  미래에 오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내지 공동체이다. 에클레시아는 이미 70인 역에서도 종교적․ 예배적 개념으로 되어 있었거니와, 그 후 점점 더-쿰란문서에 카할이라는 말이 확실히 드문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종말론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즉 마지막 시대의 참 하나님 공동체로서의 에클레시아가 되어가는 것이다.20)


  (5) 에클레시아는 모여 있는 공동체를 뜻하는 동시에 모임의 사건 내지 과정을 뜻한다. 교회는 과거에 세워져서 영원히 존속하는 기관이 아니다. 언제나 새롭게 하나님의 부르심 받고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이며 다시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사건과 과정 속에 있다. 교회의 존재는 정체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고 확장되는 사건과 과정 속에 있다.21)

  (6) 에클레시아는 단수(單數)의 에클레시아(행15:41, 16:5)를 말하기도 하고, 복수(複數)의 에클레시아(고전11:16, 14:33, 고후8:18, 11:8, 12:13, 갈1:2, 22, 롬16:4, 16)를 말하기도 한다. 모든 에클레시아를 포괄하는 전체 교회의 개념은 에베소서에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난다.22)

  교회의 개념은 다양한 면을 가진 개념이기 때문에 거기에 적용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언제나 정확하게 동일한 함축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에클레시아는 가장 흔히 어떤 일정한 지역, 즉 지 교회에 있는 일단의 신자들을 나타낸다. 어떤 경우에 이 말은 소위 가정 교회, 즉 어떤 개인집에 있는 교회를 나타낸다.(롬16:23, 고전16:19, 갈1:2, 살전2:14 등)22) 또한 에클레시아는 세계 모든 교회들의 범세계적 모임과 사귐을 가리키기도 한다.

  각각의 에클레시아(각 개별 집회, 개별 공동체, 개별교회)는 그것이 바로 에클레시아(전체 집회, 전체 공동체, 전체교회)인 것은 아니나, 에클레시아를 완전히 현실화 한다. 한스 큉은 이것에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첫째, 지방 에클레시아는 전체 에클레시아의 “부분” 또는 “구역”이 아니다. 그것은 참 교회의 하부 단위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기구가 큰 교회일수록 서열이 높은 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교회만을 교회라고 부르는 관습은 결코 좋은 것이 못 된다. 지방교회는 비단 교회에 속할 뿐 아니라 바로 교회다.

  둘째, 전체 에클레시아는 지방 에클레시아의 “집합” 또는 “연합”이 아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에클레시아라는 고유하고 동일한 명사로 여러 장소의 여러 공동체를 가리키고 있고 단수와 복수 형태를 섞어서 쓰고 있는 곳도 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편지(특히 에베소)에서는 에클레시아를 초장소적인 의미로 쓰고 있는 곳도 있다. 지역교회와 전체교회의 관계가 신약성서에 신학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명시되어 있는 바는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즉, 각 지역교회들을 일치시키는 요소는 단순히 공통의 명칭도 아니요, 외적인 결합도 아니며, 개별교회보다 우위에 있는 조직도 아니다.

 

  개별교회는 모두가 같은 복음, 같은 사명, 같은 약속을 받아가지고 있다. 각 에클레시아, 각 집회, 각 공동체는 - 아무리 작고, 아무리 빈약하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 완전히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하나님의 집회,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교회의 발현이요 표현이며 실현이다.22)






Ⅲ. 교회의 본질


  신약성서는 교회에 대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표상(表象)들은 문자적으로나 은유적 표현으로 교회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각기 교회의 특수한 면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지니고 있는 특질 혹은 특성들에 관하여 접근할 때 주로 사용해온 방법은 교회의 표지(標識)들인-통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 등을 다루는 것이 전통적인 것이었으나, 그러한 전통적인 방법대신, 신약성서에 나타난 여러 가지 교회개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피조물)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 자신은 교회에 대해서 거의 아무 언급도 하지 않으셨다. 교회(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말은 복음서에 단 두 번 나온다. 처음 것은 예수께서 “이 반석 위에”(마16:18)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말씀하신 구절과 두 번째 것은 회개하지 않는 현재의 죄는 교회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마18:17)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구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basileia tou theou)라는 구절은 공관복음에 100회 가량 나타난다.22)

  한스 큉은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데서 하나님 통치가 무엇인가가 완전한 의미에서 선포되고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지금의 이 중간 시기에 바실레이아와 에클레시아가 동일시 될 위험에 크다고 한다. 교회와 바실레이아를 동일시하기 쉬운 까닭은, 하나님 통치란 아무리 미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동시에 현재적인 차원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현재에 돌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저 현재의 발전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초월적․종말론적 성격을 고려할 때, 여기서 어떤 동일성도, 나아가 어떤 연속성도 주장할 수 없다. 동일성(교회=하나님 나라)이 있을 수 없음은,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통치란 온 세계를 포괄하는 최종적․결정적인 바실레이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속성(교회에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난다)도 있을 수 없음은, 온전히 새롭고 즉각적인 하나님의 완성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23)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어떻게 실현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출현 속에서 빛나고 있다. 그것은 고난절에 가능하게 되었고, 부활절에 실현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짐을 지었다는 사실을 통하여 세워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분명히 입증되는 것이다.23)

  에클레시아는 본질적으로 현재의 것이요 미래에는 지양될 것인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현재에 돌입해 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결정적으로 미래의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마지막 시대에 중간 시기를 순례하는 어떤 잠정적인 것인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마침내 모든 시대의 마지막에 결정적으로 영광이 나타날 어떤 확정적인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죄인과 의인을 동시에 안고 있는 반면에, 바실레이아는 의인과 성인의 나라다. 에클레시아는 아래로부터 자라나고, 현세적으로 조직화할 수 있으며, 발전․ 진보․ 변증법의 소산이다. 요컨대 인간의 일이다. 그러나 바실레이아는 위로부터 돌입하고, 즉각적인 활동이며, 측량할 수 없는 사건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이 통치의 주체다.23)

  한스 큉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전조로 보았다.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 통치의 선포에서 유래한다-하나님통치는 그 시작이요 기초다. 그리고 그것은 계시되는 하나님 통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하나님 통치는 그 목적이요 한계이며 심판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내다보고 기다린다. 아니 그 나라를 순례하며, 전령으로서 세상에 그 나라를 선포한다. 하나님 통치 최후의 승리는 아직 훗날의 일이지만, 그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 사실이 된 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교회는 아직 죽음의 그늘 아래 헤매고 있지만, 비단 부활을 내다보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미 부활한 주님이신 예수 안에서 결정적 사실이 된 부활을 되돌아보고 있다. 이 살아 있는 주님은 교회와 함께 있다. 이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영광중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까지 항상 교회와 머문다, 그때까지 교회는 이 주님의 통치하에 있다. 이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 지금 이미 효과를 내고 있다.24)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분명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 자신의 교회를 세울 실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신 후 곧바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하늘나라) 열쇠를 네게 주리라”(마16:18-19)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임을 추론할 수 있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둘째,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한다.

  넷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다섯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인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통치의 현시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우리 시대에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형태인 것이다.25)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집, 제도, 혹은 사업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 그 공동체이다. 오고 있는 하나님의 세계의 운동과 관련을 맺지 않는 교회는 의미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합일되었으며, 지금까지의 죄와 죽음의 조직으로부터 벗어났다.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시는 성향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의(義)의 성장,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26)

  결론적으로 우리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표징(表徵)”이라 부를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지만 하나님 나라로부터 구분된다. 그러나 교회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관련되어 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큰 나무의 그림자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과제를 가진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사도요 전령이어야 하며, 봉사자이어야 한다. 예수 자신이 그의 모든 선포와 활동의 중심으로 삼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의 봉사에 있어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복음서의 예수는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 그는 자신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기 영광은 거부되어야 하며 교회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둘째,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소위 심령의 세계나 피안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다스리는,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물질적 현실이다. 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되, 그것이 사회와 역사 안에서 현실화되어야 할 것으로 선포해야 한다.

  셋째, 복음서의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죄의 용서와 개인의 회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개혁이 하나님 나라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철저한 변화 없는 지속적 사회 변혁도 기대하기 어렵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어야 하며, 자기를 비우고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복음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죄인에 대한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한다. 그것은 소외된 사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기쁜 소식으로 선포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러한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불안을 주는 권위적이고 무서운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땅의 백성들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용서와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선포해야 한다.

  다섯째,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 선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겠으나,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27)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기에 그 전조로서 교회도 온 것이지, 교회가 왔기에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 안에 있는 교회는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그 활동 안에서 그것을 선취하는 새로운 인류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이다. 기독교의 메시아적 잠정성(暫定性), 즉 역사적인 실존(순례자, 나그네로서의 삶)은 스스로 사회적, 역사적 한계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역사적 궁극성, 즉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로 하여금 그 어떠한 불확실한 역사 속에서도 확신과 기쁨을 갖도록 만든다. 잠정적이나마 궁극적인 확신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지향하는 잠정적 불안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반사하여 투영하고 선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인 표징을 수립하는 “메시아적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28)



2. 하나님의 백성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대표적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히4:9, 11:25, 벧전2:10 등)혹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벧전2:9)의 개념이다. 최초의 공동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하나님의 종말론적 사건으로 일어났으며, 구약성서의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유대교로부터 사실상 구분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새 이스라엘” 내지 “참 이스라엘”로 이해했다.29) 예수 부활 사건과 성령강림 사건을 기점으로 낡은 율법시대는 지나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 주었다. 이들은 새 시대에 적합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새 공동체가 곧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믿었다. 이 새 이스라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 이방인 할 것 없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새 생명을 얻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이스라엘, 곧 새 이스라엘이다.30) 새 이스라엘은 외면적 유대인이 아닌 내면적 유대인으로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따라서 할례는 육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가 된다.31)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백성’이라는 주제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 -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인데 (마16:18) - 으로 이루어졌다는 모든 주장에 비추어 볼 때, 베드로가 그의 서신들에서 결코 “교회”라는 말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될 백성입니다”32)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는 이스라엘만을 지칭했던 구절들이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새 백성인 교회에 적용되고 있다. 바울도 “우리를…자기 백성을 삼으시고…깨끗하게 하시려는”(딛2:14)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말할 때에 동일한 성경을 되풀이한다. 바울과 베드로는 둘 다 호세아 2:23 -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 을 인용하고 있다.(롬9:25; 벧전2:10)33)

  바울은 신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6:16).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행위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신다는 이러한 개념이 더욱 확대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을 모두 교회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주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살전1:4)라고 쓰고 있다.34)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아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약 백성으로 부르실 때 그들로 자신의 풍성한 축복 안에 이기적으로 안주하라는 의도로 부르신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향유할 수는 있지만, 이웃을 우리의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하나님의 부름심은 희생적으로 자신의 사랑과 은사를 우리 주위의 고통당하는 궁핍한 세상에 나누어 주는, 타자(他者)를 위한 삶을 사는 데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같이 말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들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니”(신4:5-6)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친히 다른 민족의 눈앞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면 신약의 하나님 백성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로 부르심을 입었다.

  “오직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니…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9. 11이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세상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인 것이다.35)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아 부름심을 입어 교회공동체를 이룬 것에 대해, 한스 큉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인 교회가 범하기 쉬운 오류에 다해 다음 4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첫째, 교회는 성직자 중심이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 백성이라면, 교회는 결코 어떤 특정한 계급 또는 신분이나 교회내의 어떤 특정한 당국 또는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온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 에클레시아며, 온 신앙인 공동체다. 모두가 선택된 민족이요, 왕다운 사제단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교회를 평신도와 구별하여 마치 평신도는 완전한 의미에서 “라오스”(laos)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 위주의 그릇된 교회관이다. 교회 내에서 무슨 직무를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직무야 어떻든 한 “신자”, 즉 믿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희망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둘째, 교회는 개개의 개인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이다: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만인의 구원을 원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의 부름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결정적인 주도(主導) 행위다.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래로, 그리고 모세와 이집트 탈출 이래로, 부름을 받은 백성인 것이다. 신약에서도 각 제자들의 부름에 관한 길고 짧은 이야기들은 봉사에의 부름의 이야기들이다. 이 봉사는 이제 물론 종말론적인 하나님 백성의 봉사요, 또 이 백성은 모두가 “선택된 민족”(벧전2:9)으로서 불린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의 구원이다. 교회의 출발점은 이렇게 신자 개인이 아닌 하나님이다. 교회의 존재와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미리 결정되며, 동시에 전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존한다.

  셋째, 교회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모두가 각자의 인간적인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 백성이다: 교회를 실체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없이 교회란 없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부름과 선택 없이 교회란 없듯이, 인간의 순종하는 신앙의 응답과 동의 없이도 교회란 없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사랑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란 없듯이, 부름을 받은 인간의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 없이도 하나님의 백성이란 없다. 각자의 신앙 없이 단순히 출생․ 인종․ 전통에 의해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 백성이라면 어불성설인 것은,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하나의 신에 준하는 실체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실체론적인 그릇된 교회관이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교회를 이루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과 유리되어 하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신앙인이라는 백성 없이 교회란 없다. 하느님도, 그리스도도, 성령도 아니요 우리가 교회다. 우리 없이는, 우리 밖에서는, 우리 위에서는, 교회란 아무런 현실성도 없다.

  넷째, 교회는 이상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신앙인들의 하나님 백성은 역사상의 백성이다: 교회를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결코 지상의 공간과 현세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초연히 존재하는 정적․ 초역사적 현상이 아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현세의 민족들에서 거듭 새로이 소집되는, 그리고 시간 속에서 방랑하는 백성이다. 교회는 구약 백성의 역사를 계승하고 진보시켜 신약으로 성취한다.

 교회가 참으로 하나님 백성이라면 어불성설인 것은 교회를 모든 현세적인 것, 모든 과오, 모든 죄악과 무관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주의적인 그릇된 교회관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상의 현실 교회는 퇴색하여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거짓 후광에 싸인 이상으로 화하고 만다. 이런 이상 교회는 결함도 과오도 없고 오류도 죄악도 모르며, 따라서 참회도 회개도 필요 없는 교회이다.36)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온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궁극 목적”이 아니라 그것의 시작이요 매개체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앞당겨 오는 “표징”이요 “메시아적 배경”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에 대하여 하나 됨과 구원의 희망이 파괴될 수 없는 생식세포(Keimzelle)”이다. 그것은 “민족들의 빛”이다.37)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과 그 백성이 되기 위하여 주변의 영적, 도덕적, 이교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38)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바울은 불경건, 세속적 정욕을 내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39)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선한 덕을 갈망하는 자신의 소유된 백성을 정결케 하시려고 자신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우리가 기다리면서 깨어 바르고 거룩하게 이 세상에서 살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가 그 백성으로 살 때에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의 몸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각각 그 지체입니다”(고전12:27).  “몸”이란 표현은 그 사용 빈도와 언급된 절수로 볼 때에 신약성경에서 교회의 의미로 사용된 가장 보편적인 비유이다. 대표적인 본문으로는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로마서12장:4-5절과 성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우리가 다 한 덩어리요, 한 몸이라고 언급한 고린도전서10:16-17절, 11:29절 그리고 최소한 열일곱 번 이상 이 단어를 쓰면서 이 비유를 세부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는 고린도전서12:12-27절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에베소서에서 일곱 번, 골로새서에서 다섯 번 사용되었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가장 보편적인 예증이기 때문에 세심하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40)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은 세 가지로 사용된다. 첫째는 가현설(docetism)과 직면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의 증거이다. 성자가 인간의 몸을 취하셔야 했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히2:14이하), 특별히 속죄를 위해(히10:20) 긴요한 사실이다. 부활에서 그 몸의 변형은 신자들에게 있어 부활의 몸의 보장이며 원형이다(고전15; 빌3:21).

둘째, 최후의 만찬에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떡(마26; 막14; 눅22; 고전11; 고전10:16)으로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이것이 나의 희생을 대표한다.”로 또한 “이것이 나 자신이다”로 해석되어 왔다. 셋째, 고전10:16, 12:27에서 바울에 의해 일단의 신자들의 묘사로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롬12:5)과 지역 교회나 보편적 교회를 언급하는 절들, 즉 고전10:17; 12:12; 엡1:23; 2:16; 4:4, 12, 16; 5:23; 골1;18, 24; 2:19; 3:15의 몸이란 어구가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과 이 어구가 가시적이며 회중적이며 또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서 각 지역 회중의 구성원들 간에 존재하는 일치를 정의하고,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전체 교회가 고려되고 있다.41)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상이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동안에는 인간의 육체 안에서 활동하신 것과 똑같이,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는 장소라는 것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보편적 교회는 물론 개별적인 지역 모임들에 관해서도 사용되고 있다.42) 

  에베소와 골로새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보편의 교회라는 뜻에서 “그의 몸인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온 우주가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를 원했다: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 위에 높이” 계시고, 하나님은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이전에 계시고 그 안에서 모든 만물을 붙드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며 처음이시며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부활하신 자로서 모든 것에 뛰어나시다” 이 편지들에서 중요한 점은 전체 교회 위에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전체 교회를 위하여 만물 위에 행하시는 그의 권위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보편 교회이다. 하지만 로마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지역적 몸의 조화와 질서를 강조한다. 그곳에서 지도자들의 개성에 따른 분열, 성령의 은사와 사역에 관한 논쟁, 주의 만찬에 관한 혼란과 불일치에 대해서 그는 자기들이 지역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사실을 생각나게 했다. 몸의 지체는 다르나 모두 한 몸에 속한다는 것과 손과 발, 눈과 귀는 고유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몸의 가장 연약한 지체일지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몸을 살피지 않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43)

  이 같은 유추를 사용해서 바울은 교회에 관한 주요 진리를 강조한다. 그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1) 교회는 지교회(之敎會)인 동시에 세계교회라는 것을 말한다.44)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니라”(고전12:27) 등은 지 교회를 가리키는 의미이며,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2,23)와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등은 보편적인 세계교회를 의미하는 말로 이런 표현들은 교회가 유기적 단일성을 띠고 있음을 강조해 준다.45)

  2) 교회는 한 몸임을 말한다. 즉 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통일성을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로 근심하였으며, 그의 편지에서 “모두 일치되는 말을 하여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없게 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으로 굳게 합하기를 바랍니다.”(고전1:10)라고 촉구하였다. 몸의 통일성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분열과 균열을 의식한 것이다.46) 바울은 주님과 함께하는 교회의 통일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몸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하나의 집단이나 사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몸이다. 어떤 지상적인 다른 공동사회와 비교 할 수 없으면서도 지상의 현실이며, 교회 안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비유의 일차적인 강조점은 믿는 자들과 그리스도의 통일성이다.47) 그러나 이러한 통일성은 단일성(單一性)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안에 있는 한 몸 됨을 말한다.48)

  3) 교회는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신자들의 상호간의 연결 관계를 말해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코 고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니다.49) 이것은 개인주의와 정반대이다. “하나님께서는 변변하지 않은 지체들을 더욱 귀하게 다루셔서 몸에 조화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서로 같이 걱정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같이 즐거워합니다.”(고전12:24-26) 우리는 우리가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과 또 다른 이들도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50) 서로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서로의 문제를 함께 나누는 “삶의 공동체”, “형제자매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4)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보편적이다. 그것은 그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3:11). 이와 동일한 사상이 롬11:25-26,32; 갈3:28; 엡2:15등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러한 구절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모든 구분이 그 몸 안에서 제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51) 이는 교인들과 교회들의 평등을 말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평등한 사람들의 사귐”이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을 수 없으며, 성직자를 평신도로부터 구분하여 특별한 성직자 계급을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백인종과 유색인종, 여자와 남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 교육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 신체장애자와 건강한 사람이 함께 만나고 사귐을 나누며 교회 공동체를 함께 이끌어 나가야 한다.52)

  5)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지체들의 다양성(多樣性)을 가지고 있다. 그 몸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체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 바울은 몸의 비유를 아주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발, 손, 귀, 눈, 머리 그리고 덜 존귀해 보이는 지체들을 모든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은사들의 목록을 제시한 다음, 문법적으로 강한 부정을 요구하는 수사학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예컨대 첫 번째 질문은 “다 사도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는 없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53) 바울은 에베소서 4:7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 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구절의 문맥 속에서 우리가 은사를 받은 것이 전체 몸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들은 고전12:7; 벧전4:10에서도 나타난다.5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르다(롬12:4-6). 지체들 가운데 있는 은사의 다양성은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은사를 기꺼이 주려 하시는 것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주기를 거부하시는 것에 관해서도 그 분의 주권적인 권리를 인정하여야 한다.55) 교회는 모든 점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므로 서로의 관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한 몸에 속하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교회”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며 협동해야 할 것이다.56)

  6)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즉 그분의 몸이다. 교회의 삶의 현실 속에 그리스도의 삶의 현실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삶이 교회의 삶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한 몸 됨은 성찬에 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 나타난다.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포도주는 그의 피다. 교회 공동체는 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며”(고전10:16)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57) 주의 만찬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요 집회요 공동체임이 비할 데 없이 분명히 드러난다. 주의 만찬에서 교회는 거듭 새로이 구체화된다. 바울은 “빵이 하나이니,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고전10:17)라는 말로 더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주의 몸을 먹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한 몸이 된다. 주의 몸을 받음으로써 공동체 자신이 한 몸으로 나타난다. 모두가 한 빵을 , 한 주님의 몸을 먹는 성찬식에서야 말로 다른 어디서보다도 구체적으로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58)

  7)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활 전체에 현존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존이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가 교회로서 존재 하신다’는 계시 형태를 말하고 있다”고 했다.59)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바로 교회도 존재 한다”고 하였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다. 라는 것이다.60) 그러나 특별히 두드러지게 예배의 모임에 현존한다. 여기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부름을 받았고, 여기에 세례를 통하여 받아들여졌으며, 여기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고, 여기서부터 다시 세상에 봉사하기 위하여 파견된다.61) 교회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 사회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종교적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사회 안에 있는 존재” “사회적 존재”인 것처럼 교회도 “사회 안에 있는 존재” “사회적 존재”이어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뒤를 따라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되어야 하고, 이 사회와 세계 안에 세워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 교회 안에 실존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당위성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他者를 위한 존재”라면 그의 지상적-역사적 실존 형식인 교회도 “他者를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그러한 한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62)

  8)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엡1:22; 4:15; 5:23; 골1:18),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63)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신약성서에서 몸과 머리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곳에서는 몸으로서의 교회 자체보다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에 역점이 주어지고 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몸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생하게 활동하는 교회의 머리라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교회를 고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특별히 머리에 의하여 성령 안에서 주어진 일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64) 머리가 몸에 속하듯이 몸이 머리에 속함을 나타냄으로써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사신 교회는(행20:28) 철저히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교회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주를 갖지 않으며 그를 섬기지도 않는다.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자기의 민족도 교회의 주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주는 머리되신 그리스도 한 분 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동시에 철저히 구분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 된 교회로서 실존하는 동시에 이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로부터 구분된다.65) 몸인 교회의 머리로서 그는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는 그의 인도하심과 행하심에 따라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9)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장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편이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요 입이며 목소리라는66)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로서 실존하는 동시에 온 우주와 모든 피조물들을 포괄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에 제한되지 않는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도 교회자체에 있지 않다. 교회는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 안에 세우기 위하여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의 “성 장”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67) 그리스도의 몸은 성장한다-이것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중요한 진술이다. “온 몸은 머리로부터 관절과 힘줄을 통해 영양 공급을 받고 일치하여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골2:19). “몸의 머리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살아난 분”인 그리스도는 성장의 시작이다(골1:18). 몸은 머리를 향해 자란다. 마디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 그분을 향하여 온전히 자란다(엡4:15). 그리스도의 몸은 내적으로 성장한다. 이것은 “내 육신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우는” 그런 “고난”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앙과 인식과 사랑의 성장이다(골1:24). 그리고 외적으로도 자란다. 이것은 복음의 설교를 근거로 세례에 의해 합체되는 새로운 지체들의 성장이다.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분의 충만”이다(엡1:23).교회는 자기 몸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성취로서68) 그리스도의 사역의 연장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할 것이며, 또한 놀랄만한 정도로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4:12) 그러므로 만일 언젠가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수된다면, 그것은 그의 몸인 교회에 의해서 완수될 것이다.69)



4. 성령의 殿(피조물)


  교회 또는 신자가 “성령의 전” 또는 “하나님의 전”으로 불리어진 예는 다음과 같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1, 22),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2:5).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해 준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교회는 신성불가침한 곳임을 나타내주고 있다.70) 그러면 교회가 성령의 전, 피조물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교회 본질의 한 영역을 정리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영은 교회를 채우고 있다. 성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영이 채워져 있고, 영이 활동하고 있는 성전이요 건물이다. 요컨대 영의 집이다. 개별교회도 영의 집이요(고전3:16-17) 전체 교회도 영의 집이다(엡2:17-22). 신앙인들은 영의 집으로 지어지는 사람들이요 영의 집을 짓는 사람들이다(벧전2:4-7)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오는 영에 의해 충족되고 생활하며 유지되고 인도된다. 교회의 모든 원천 ․ 존재 ․ 존속이 영의 덕택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영의 피조물이다.71)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교회를 창조하시고 계속적으로 갱신하시는 능력은 바로 성령이다. 교회가 설립되고 바로 그렇기에 항상 거듭 설립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이 활동함으로써 교회가 생겨났고, 또 지금도 교회가 계속 존재하고 있다.72) 

  2) 그러나 성령을 교회와 동일시 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신약성서 어디에서도 성령을 “교회의 영”이라고 부르는 곳은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만 부른다.

  이 영이 나오는 곳은 교회도 그리스도 신자도 아니요 하나님 자신이다(롬8:9; 빌1:9; 갈4:6; 고후3:18).73)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에게 보냄을 받았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의 형태, 그의 삶의 표현과 확증이다.74) 이 영을 통하여 하나님은 교회 안에 활동하고, 교회에게 자신을 계시하며, 교회에로 내림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유지한다.75)

  3) 그러므로 성령은 교회의 소유물이나 재산이 될 수 없고 더구나 교회 내의 어떤 특별한 그룹의 전유물은 될 수 없다. 성삼위의 제3위로써 성령의 주권을 인정해야 하는데, 첫째로 교회는 성령을 통제 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내의 어떠한 교회 직임에 매어있지 않으실 것이다. 성령을 제도화된 형식에, 전통적 패턴에 매어 두려는 교회는 곧 자신이 죽게 되고 무력하게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둘째는 교회내의 어떠한 그룹이라도 성령에 대한 특별한 독점은 주장할 수 없다. 진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다.76) 지금 성령께서는 교회에 내주(內住)하고 계신데, 신자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개별적으로 내주하실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 안에 공동으로 내주해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77)

  4) 교회와 성령을 구별해서 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성령과 교회를 구별할 줄 아는 교회는 교회 내에도 죄와 허물이 있음을 냉정하고 겸손하게 인정할 수 있다. 교만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는 교회가 아무리 강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결국 약한 교회요 겸손하게 자신을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과 구별하는 교회는 비록 약함을 부인할 수 없더라도 결국 강한 교회이다. 자유로운 하나님의 영은 진정한 자유의 영이다. 혼란이 아니라 질서의, 모순이 아니라 평화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을 지배한 것은 그 자신의 법이외의 다른 법이 없고, 그 자신의 은총 권리이외의 다른 권리가 없다. 교회는 성령에게 명령하고 성령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 “오소서”라고 기도하고 권할 수 있을 뿐이다.78)

  5) 교회는 예수가 성령가운데서 하신 일을 계속하는 한에서 성령의 전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의 짐을 짊어지며 하나님나라를 선포한다.79) 성령은 인간을 위해 인간에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오셔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편을 들어서 행동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긍정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을 긍정하도록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80)

  6) “성령의 전”으로서의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이다. 그것은 각 지체들이 성령으로부터 받은 카리스마 곧 은사요 이 은사에 따라 각자가 행하는 봉사를 통하여 삶을 영위한다. 고린도전서는 각자가 받은 은혜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이 서신은 교회의 카리스마적 구조에 대하여 말하는데, 교회의 카리스마적 구조는 바울 서신 어디에나 전제되어 있으며 또 그 속에 나타난다. 신약성서의 후기 문서로 알려진 목회서신에서 각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와 은사를 받는다는 바울의 생각은 약화되고 제도교회 내지 교직기구로서의 교회관이 나타난다. 제도교회적 교회 관에 의하면, 성령은 성직자의 임직과 함께 성직자에게  주어진다. 이리하여 성령의 은사와 활동이 제도교회의 성직자에게 제한될 수 있는 위험성이 나타난다.81) 카리스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귐은 구분 없는 획일성이나 계급적 억압을 배제한다. 은사의 다양성은 실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포괄적 은총의 단일성의 표현이다. 구분 없는 평준화는 단일성보다는 오히려 황량한 공허를 가져다준다.82)

  7) 성령은 교회에 풍성한 은사를 선사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가 수여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의 유익, 교회의 건덕(고전12:7), 즉 사귐에 있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이 사귐으로 인도하지 않고 공동체를 전체로 형성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 은사를 가진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교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영역을 만드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육의 사람(고전3:1)이다.83) 카리스마는 단순히 옛날 일(초대 교회에 있을 수 있었거나 실지로 있었던 일)만이 아니고 극히 현실적인 현재의 일이며, 비단 부수 현상이 아니라 극히 본질적인 교회의 중심 현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카리스마적 구조는 교회의 직무 구조를 포괄하고 능가하는 구조로서 논의되어야 한다.84)

  8)그러면 교회에 충만한, 이 엄청난 다양한 카리스마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다양성 속에서도 통일성이, 자유 속에서도 질서가 보존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은 일치를 낳고, 질서를 낳는다는 것이다: “은사는 물론 여러 가지로 나뉘어 베풀어지지만 영은 같은 영이십니다. 그러나 각자에게 영을 드러내는 은사가 베풀어지는 것은 공익을 위한 것입니다”(고전12:4-7) 각자가 자기의 카리스마를 가지는 것이야말로 일치와 질서에 기여한다. 각자에게 자기의 것을 가지는 것이 카리스마적 교회질서의 기본원리다. 둘째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셋째는 주님께 순종을 하는 것이 교회 질서의 원리이다. 카리스마에 의해 규정되는 교회 질서란 혼란과 무질서로 흐르고 마는 열광도 아니요, 획일과 균일로 얼어붙고 마는 율법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 질서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3:17)85) 


  고대 기독교의 한 축복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기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돌리고 하나님에게 “사랑”을 돌리는 반면, 성령에게는 “사귐”의 은사를 돌리고 있다. 여기서 성령의 내적 본질은 분명히 사귐의 능력에 있음이 천명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공동체적 신성(Fr Holderin), 서로의 사이에서 오가는 하나님(J. V. Taylor), 나와 너의 신적 통일성(L. Feuerbach)이라고 말할 수 있다.86)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개방시키고 그와 사귐을 나누게 하는 자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 생명과 봉사, 기쁨과 책임을 선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육, 즉 인간의 갈망과 자기 신뢰와 투쟁하는 영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롬8:14; 갈4:6-7), 특히 기도를 통해서 그와 사귐을 나누도록 활동한다.87)

 

  성령은 교회를 각성하고 생동하게 하며 조명하는 능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 그의 선행적인 계시가 아닌 다른 사역, 그를 인간에게 인식시키지 않는 다른 활동을 결코 하지 않는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하고도 효과적인 자기 증거, 자기 현재화, 자기 전달이다. 그러한 일을 통하여 성령은 교회를 설립하고, 생동하게 하며, 조명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모으고, 조명하고, 거룩하게 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신앙하도록 보존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교회를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이다.88) 교회가 성령을 통하여 가능하게 한다면, 교회는 소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뜻에서 성령의 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에 사로 잡혀 있다면,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곧 “새 창조의 역사”가 교회 안에서, 교회와 함께, 교회를 통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는 철저히 “他者를 위한 존재”요 세상의 연약한 자들과 더불어 있는 존재였다. 교회가 그의 영으로 충만하다면, 교회도 철저히 “他者를 위한 존재”요 세상의 연약한 자들과 더불어 있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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