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스크랩] 소설 속의 예수(1)

undertree 2007. 9. 4. 17:06
 

  알버트 슈바이처는 ‘예수 연구사’를 통해 근대 기독교는 예수의 역사성을 포기해야할 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가 어떤 근거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저로써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후, 역사적 진실에 한 발 다가서기 위하여 유대사와 로마 역사를 두루 살펴보게 되었으며, 예루살렘에 관계 되는 책자를 열심히 찾아 읽었습니다. 그 결과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역사성에 한 점 의혹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고대 유물이 두꺼운 퇴적층 밑에 묻혀 있듯이 예수의 참 모습도 각종 어휘가 홍수를 이룬 가운데 심해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돌프 볼트만과 같은 학자도 신약성경 속에서 예수의 언행을 여과시켜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참 모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이랴말로 예수의 역사성을 입증하고, 더 나아가 예수 이름으로 전해지는 부정적 사유를 근절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믿음’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요상한 분위기부터 깨뜨려 보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바국이라는 책자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는 무려 244번이나 나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사람도 우연찮게 알아냈습니다. 힐렐이 그 사람입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온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바빌로니아에는 느브갓네살 왕 시절 포로로 잡혀갔다가 바벨론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에게 망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으나 귀국하지 않고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눌러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힐렐의 조상도 그 중 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힐렐이 예루살렘에 와서 명성을 날리던 기원전 40년경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합니다.  

‘공부하는 것이 사실상 예배하는 방식이다.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

  힐렐은 서기 30년대 예수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죽음을 선전하면서 그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힐렐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고 넘어가십시다.

  기원전 200년경 유대는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 통치 밑에 있다가 시리아의 셀루커스 왕조 지배를 받게 된 시점에서 야손이 시리아 왕에게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을 삽니다. 그러자 메넬라우스가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 직을 가로챕니다.

  이 때, 전통 대제사장 가문 사독의 후손 오니아스3세가 이집트로 도망을 가면서 그 곳에 예루살렘 성전에 대항하는 레온토폴리스 성전을 세웁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의 그리심 성전과 이집트의 레온토폴리스 성전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같은 시기에 있던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그 무렵 야손이 대제사장 직을 되찾을 욕심에 메넬라우스를 몰아내고 다시 권력을 장악하자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4세는 야손을 붙잡아 갑니다. 그리고는 유대교의 종교행위를 금지 시킵니다. 이 때문에 안식일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사내아이가 태어나도 할례를 시술하지 못합니다. 성전에 보관 중이던 토라 5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그러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올림피안 제우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며 양이나 염소 대신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가정 집 대문에 향을 피우는 작은 항아리를 매달거나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시리아에서 내분이 발생하고, 셀루커스 왕조가 쇠퇴하자 요한 히루카누스가 헬라파 유대인들과 싸워 이기면서 예루살렘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3년 5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보수공사를 하다가 잃어버린 5경중에서 신명기를 찾았다면서 기뻐합니다. 이 때 환란 중에 신명기를 사마리아인들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도적질해 간 것이라며 돌려달라고 하자 요한 히루카누스가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 그리심 성전을 불태워버립니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기에 민심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열중하는 것이 성전 의식에 참여하는 것보다 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힐렐은 이런 맥락에서 공부하는 것이 사실상 예배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던 것이고 이후, 성전을 바라보면서 만족해하던 표적 신앙은 학습을 통해 지식을 숭상하는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려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마련인데,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 장군이 성전 본당 건물에 들어가 야훼가 현존한다고 알려진 지성소를 살펴보고 아무도 없더라고 말한 사건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부터 성전에 대한 국민적 기대 심리는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이후, 성전을 바라보면서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서기 54년, 성전 봉헌식을 준비하던 중 폭도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때 안토니요새 로마 병사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성전은 폭도들 손에 망가질 뻔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70년 반군 지도자 기스칼라 요한과 시카리당 시몬이 로마군에 쫓기면서 예루살렘에 숨어들었고, 전쟁과 무관한 사람들이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자 반군 지도자들이 성문을 닫아걸고 로마군과 일전을 벌리다가 어이없게도 패하고 맙니다.

이것이 소위 요세푸스가 말하는 ‘유대 전쟁사’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이 때, 성전 본당 건물에 들어가 농성 중이던 열심당원들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에 불을 지르고 비밀 지하 통로를 따라 도주합니다.

  당시의 참상을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사상자 1,100,000명, 포로로 잡힌 자 97,000명, 아르테스의 좁은 골자기로 도망친 자가 3,000명에 달했으며, 시카리당 지도자 시몬과 기스칼라 요한은 포로로 잡혀 티투스 장군의 전리품으로 로마에 압송되었다.’


  기왕에 시작했으니 예루살렘에 성전이 들어서게 된 내력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본시 유대인들의 조상 히브리인들은 성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그들이라서 장소 제약을 받아야 하는 성전보다는 이동이 자유로운 장막을 선호했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인이라 함은, 기원전 930년경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남쪽에는 유대 왕국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스라엘 왕국이 들어섰는데 그 이전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표방하던 민족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폭력적 성향이 강한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다윗과 같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인데다 글재주가 뛰어나 자신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표현하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영토 확장을 위해 주변국들과 싸움을 해야 하니 자기와 야훼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 .’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과 시대상황을 결부시키면서 마치 야훼의 계시를 받아 태어난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전쟁터에 나가서도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야훼께서 계신 줄 알게 하리다.’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 승전을 거듭하자 지금까지와는 달리 야훼는 전쟁을 좋아하는 신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히브리인들 중에서 지각 있는 사람들은 다윗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야말로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면서 죽음의 함정으로 몰고 가는 세력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궁궐을 세운 다음 ‘나는 백향목 궁궐에 거하거늘 법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하면서 궁궐 뒤편에 성전을 세우려 하자 반대를 했습니다.  

 ‘당신은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니 성전을 짓지 못한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 생전에 성전을 세우지 못합니다.

아비의 유업을 이어받은 솔로몬 때에 가서야 세워집니다.

이로써 기브온 산당의 장막 시대가 끝나고 성전 시대가 열립니다.  


  기브온 산당의 장막 시절 대제사장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십시다. 그리고 솔로몬 성전 이후, 대제사장 지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살펴보십시다. 

  장막시절 대제사장은 속죄양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도 매사에 조심을 했거니와 유월절이 임박하면 대제사장은 별도의 장소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은밀한 공간에서 7일 동안 유폐의 시간을 보내고 해질 무렵 목욕을 하고 예복을 차려입습니다.

  세마포의 겉옷에 바지, 허리에 두루는 띠와 터번은 기본이고, 그 위에 긴 앞치마처럼 생긴 에봇을 어깨에 걸치고, 푸른색 초록색 진홍색의 가는 베실로 짠 띠를 다시 매고, 가슴에는 12지파를 상징하는 각종 보석(홍보석, 황옥, 녹주옥,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 호박, 백마노, 자수정, 녹보석, 호마노, 벽옥)의 흉패를 달고, 머리에는 청색 실에 금패가 달린 성관을 씁니다.

  이토록 예복을 차려입으면 흡사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신부가 부축을 받으면서 신랑에게 다가가듯 대제사장은 사제들에 둘러싸여 장막의 성소로 들어갑니다.

  성소에서도 당직 사제들의 지시에 따라 또 한 번의 정결의식을 치르고는 손에 호롱을 들고 깜깜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대제사장이 무슨 일을 경험하게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히브리 민족 12지파를 대신하여 속죄의 신분으로 들어갔으니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고 있으리라 상상할 뿐입니다.

  일정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대제사장은 초췌한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정결의식의 전 과정을 지켜볼라치면 마지막 순간에 대제사장은 기력이 쇠잔해질 수밖에 없도록 짜여 있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 때문에 대제사장이 고통을 받았구나!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자에 해당하는 성관을 바라보면서 거만의 죄, 성관에 붙은 금 머리띠가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의 피가 사제의 몸에 묻기 마련인데, 이로 인한 부정이 제거되었다는 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다음부터 대제사장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게 됩니다. 다윗 왕이 대제사장을 파트너로 삼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세도가가 됩니다.

그 후로 사독가문은 다윗 왕조와 마찬가지로 세습귀족이 됩니다. 그래서 야손과 메넬라우스가 대제사장직을 욕심냈던 것이랍니다.

  더구나 요한 히루카누스가 대제사장 지위에 있으면서 사악한 무리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를 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성소 안에서 야훼로부터 특별한 계시와 천상의 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니 그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면서 유대에 하스몬 왕조가 생겨납니다. 


  대제사장이 제전과 국정을 동시에 행사하면서 덩달아 사제들 신분도 높아집니다. 헤롯에 의하여 만들어진 성전의 구조를 볼 것 같으면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문을 들어서면 먼저 이방인 뜰을 통과합니다. 그곳에는 우중충한 석재 담이 시야를 가로막습니다. 높이가 3엘레(약1.575m) 이어서 키 작은 사람은 발뒤꿈치를 세워야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담장 곳곳에는 ‘담을 넘으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스 로마 아람 문자로 새겨진 경고문이 매달려 있습니다.

  이방인 뜰에서 성전 경비병에 해당하는 레위인들의 감시 속에 백성의 뜰로 들어서면 다시 사제의 뜰과 백성의 뜰을 구별하는 1엘레(0.525m) 높이의 석재난간과 마주칩니다. 그 난간에도 지팡이와 전대를 소지하거나 먼지가 묻은 발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 문구가 매달려 있습니다.

  사제의 뜰은 성전 본관 건물을 둘러싸고 있으며, 바닥이 온통 돌로 덮여 있습니다. 건물 동쪽 현관 앞은 번제단과 거대한 물탱크와 가축 도살장이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희생 제물을 드리는 동안 백성에게 출입이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이처럼 성전 본관을 비롯하여 사제의 뜰에도 백성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도록 성역 화 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사해 근처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집단생활을 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성전을 향해 비난 성 발언을 퍼부었습니다.


  사해 근처에서 집단생활을 하던 엣세네인들이야 그렇다 치고, 성전 주변에 머물면서 은근슬쩍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던 무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언제 어떤 계기로 출현하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밝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 히루카누스가 예루살렘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으면서 그들에게 산헤드린 의석을 주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전 산에서 마주보이는 아고라 지역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합니다. 요한 히루카누스는 그 집회를 보면서 성산사건을 떠올린 모양입니다.

  성산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적의 침입이 빈번한 가운데 젊은이들이 로마에서 가까운 산으로 모여들면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 하자, 원로원에서는 방위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대표를 보내 젊은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선에서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그 후, 로마 시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민중회회가 생겨났으며, 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은 그 신분이 불가침이이여서 집정관의 명령에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실력자로 행세하게 됩니다.

  따라서 호민관 선출이나 징병문제를 논하기 위하여 민회는 산 능선과 같은 지역에서 모임을 가졌을 것이고, 요한 히루카누스는 바리새인들의 집회가 민회와 비슷한 모양새로 발전하게 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산헤드린 의석을 준 모양입니다.


  산헤드린에서는 민사상 또는 형사상 고발사건이 발생했을 때 시시비비를 가려내는 일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생활 습관이나 심지여 로마법을 따르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 특유의 법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법정과 유대 법정은 엄연히 다릅니다. 로마법정은 재판관 위주의 제도입니다. 재판관의 공정한 판단을 위해 범죄를 공소하는 직분의 사람이 있고, 여기에 대항해서 고발당한 사람의 이익을 옹호하는 변호사도 있습니다. 이들의 상반된 진술을 토대로 재판관은 판결을 유도해 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산헤드린 법정은 배심원 위주였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평결에 참여하는데, 고발 자는 흰 천으로 만들어진 깃발을 들고 고발의 사유가 소문에 의한 것이 아니며 위증 사실이 드러날 경우 무고를 당한 사람을 대신하여 사형과 같은 중형도 감수하겠다는 선서문을 낭독하고 진술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죄의 유무를 투표로 결정하고 찬반의 표가 한 표 차일 경우 최소한 두 표 차 이상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합니다. 또한 판결이 났다하더라도 형이 당장에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만 하루가 지난 다음 집행하기 마련이고, 이처럼 유예기간을 두는 것은 무고한 희생자를 막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더구나 산헤드린 법정은 대제사장의 판결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총독 주재의 법정에 대해서도 간섭할 수 있는 최고 상위기관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흰 천으로 만들어진 깃발을 든 사람이 달려가면 형은 취소되고,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심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굴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법 제도가 마련 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우매한 자들에 이끌려 대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총독, 헤롯 안티바 법정을 두루 거치다가 종국에 가서는 빌라도 총독에 의하여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산헤드린 의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 사건을 지켜보고만 있었을까요?

 

(계속) 


출처 : 누렁소의 하품
글쓴이 : 김춘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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