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스크랩] 이동원 목사의 레노바레 강의안 비판

undertree 2007. 11. 13. 06:37

나는 신앙의 연륜이 깊은 사람도 아니고, 목사, 전도사는 물론 아니며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다. 다만 주님의 은혜로 부족하지만 말씀을 공부하며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간구하며 사는 성도 중 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교회에 레노바레 컨퍼런스의 포스터가 붙고 많은 성도님들이 그곳에 참여하고, 또 컨퍼런스를 위한 특별 헌금이 걷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용기를 내었다. 성도들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범죄함이 아니겠는가?

*비판 글이니 만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제외하고는 존칭(님)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은 ‘필자’로 통칭했으니 감안해 주시길 바란다.  

레노바레에서는 어떠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문제점들은 무엇인가?
레노바레 코리아 자료실에 올라와 있는 이동원 목사의 강의안의 전문을 소개한다.
그리고 차근차근 그 문제점들을 짚어보도록 하겠다.

<강의안 전문>
--------------------------------------------------------------------
지난 2007년 1월 22일에 가졌던 레노바레코리아의 첫번째 영성강좌의
이동원목사님의 강의안입니다.
제목 : 비움과 채움의 영성
강의 :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초래한 경쟁 사회는 소유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브레이크 없는 욕망 사회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욕망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은 오히려
욕망의 늪에서 더 큰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불행의 늪 속에서 역설적
으로 욕망을 포기하는 비움을 갈망하게 되었다. 

이런 현대인들의 자기 직면은 동양 종교나  동양 명상이 강조하는 '비움'이라는 단어에
선망을 갖고 삶의 해답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오늘 서점가에는 불교의 승려
들과 힌두교의 그루(guru) 들에 의한 비움의 가르침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소위, 비움
의 영성에 대한 기독교적 뿌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댜행한 것은 기독교 전통이 비단
서방 전통에만 의존해 온 것이 아니고, 소위 동방 전통이 또한 기독교 주류의 영성적
전통이었다는 것과 동방 영성의 핵심이 바로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었다는 사실이다.

1. 비움 (kenosis)

    1. 비움의 성경적 근거
        * 빌립보서 2:5~8
          -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그의 탄생 (마굿간) 과 삶 (머리둘 곳이 없으심),
            그의 죽음 (십자가와 장사)이  비움의 삶에의 자원적인 화육이었다.
        

        * 고린도후서 8:9


    2. 비움 기도의 목회적 실천

        1) 예수 기도 (Jesus Prayer)
           예수 기도의 표준적 형태인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는 6세기경  이집트의 수도자의 책  '사부 빌레몬의 생애'
          에서 처음 발견된다.  7세기경 성요한 클라마쿠스 (John Clamacus)에 의해
          영성적인 기도문으로 추천되었다.  13세기 아토스 성산의 수도자 니케포루스
          (Nicephorus)는 호흡의 리듬을 사용한 몸 기도와 함께 마음을 비우기 위한
          기도로  '예수 기도'를 그의 저서를 통해 강력하게 천거하였다.  그후 시나이의
          그레고리오는 예수 기도에 '죄인'이란 단어를 첨가하여 오늘날의 '예수 기도'의
          정형을 이루었다.    -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죄인인 저를 불
          쌍히 여기소서"

        * '예수 기도' 의 전통적인 4가지 목적
            -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의 사랑을 경험함
            -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민감성의 개발
            - 기도의 반복적인 수행  ("쉬지말고 기도하라")
            - 내적 고요를 실천하는 마음의 집중
        2) 세족식  - "이웃을 섬기시고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예수"
        3) 성찬식  - "몸을 깨트리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헨리 나우엔의 성찬 이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선택받은 자 ~ 축복받은  ~ 깨어진 자 ~ 나누는 자
                (took ~ blessed ~ broke ~ gave)

3. 비움의 영성적 실천

      1)  '관조(관상)의 기도'  (Comtemplative prayer)로 주님 만을 바라보기

      2)  이웃 사랑을 위한 자발적인 가난
 
          * 고린도후서 8:9 / 8:14 비교하기  (8:1~2)

          <잠시 조용한 곳에서 롬 1:28~32 과 갈 5:19~21 을 읽고 내가 비우고 버려야
            할 육체의 욕심들이 무엇인가를 기록하도록 하라.>

 


2. 채움 (Pleros)
    
     1.채움의 성경적 근거

          * 요한복음 1:14
          * 에베소서 3: 18~ 19 (4:13,  5:18)
          * 골로새서 2: 9~ 10

      2. 채움의 필요성
          - 지속적 비움의 위험성 (눅 11:24~26)
     
      3.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1) 하나님의 임재  (시 62:1~2, 5~6)
                - "God alone"
          2) 성령의 충만  (엡 5:18)

          3) 성령의 열매  (갈 5:22~23,  빌 4:8)

3.  비움과 채움의 순환적 역동성
       1.  교리적 체험의 '통시성' (synchronism)
 
          * 그리스도의 죽음 - 비움의 근거

          * 그리스도의 부활 - 채움의 근거

          <묵상.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확신한 성도는
            새로운 삶의 승리를 위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

   2. 비움과 채움의 적용을 위한 선결 이해

          1) 비움과 채움은 대체로 시간적이다.

          2) 비움과 채움은 동시적일 수 있다.

          3) 비움과 채움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어야 한다.

 

          <적용과 실천>
         
            1. 들숨과 날숨 (호흡) 기도로 비움과 채움을 수행한다.
 
            2. 매일의 경건 실천으로 비울 것과 채울 것을 점검한다.

            3.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를 생활화 한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채움을
                  갈망하셨기 때문이다."

                  "Let Go  -  Let God"
-----------------------------------------------------------------
이제 하나 하나 살펴보자. <강의안은 기울임체 로 구분했다.>


>지난 2007년 1월 22일에 가졌던 레노바레코리아의 첫번째 영성강좌의
이동원목사님의 강의안입니다.

제목 : 비움과 채움의 영성
강의 :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님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초래한 경쟁 사회는 소유의 미덕을 강조하면서
브레이크 없는 욕망 사회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욕망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은 오히려
욕망의 늪에서 더 큰 불행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불행의 늪 속에서 역설적
으로 욕망을 포기하는 비움을 갈망하게 되었다. 

첫 단추를 잘 끼는 것이 중요하듯, 글도 첫 시작이 중요하다. 또한 올바른 해답은 올바른 질문에서 나오는 법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동원 목사는 청중들에게 현대인들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어떤 현실을 인식시켜 주고 있는가? ‘욕망의 늪에서 더 큰 불행을 경험’하는 현실, 즉 고통 속에 있는 현실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현실을 고통으로 인식한다는 것... 이것은 불교의 현실인식과 매우 닮아있다. 불교의 현실인식이 ‘고(@)’라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즉 불교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종교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디서부터 출발 하는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을 상기해보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렇다. 기독교는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시작된다. 즉, 현실에 대한 인식의 첫 번째는 -물론 그 인식조차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은혜로만 가능하지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개역개정)”

강의 첫머리부터 너무 꼬투리 잡는 것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옳은 질문에서 옳은 해답이 나오는 법이다. 자, 어쨌든 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계속 살펴보자. 

이런 현대인들의 자기 직면은 동양 종교나  동양 명상이 강조하는 '비움'이라는 단어에
선망을 갖고 삶의 해답을 구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오늘 서점 가에는 불교의 승려
들과 힌두교의 그루(guru) 들에 의한 비움의 가르침들이 범람하게 되었다.  소위, 비움
의 영성에 대한 기독교적 뿌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댜행한 것은 기독교 전통이 비단
서방 전통에만 의존해 온 것이 아니고, 소위 동방 전통이 또한 기독교 주류의 영성적
전통이었다는 것과 동방 영성의 핵심이 바로 비움과 채움의 영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사실 문맥상 말이 되질 않는다. 불교의 승려들과 힌두교 그루들의 비움의 가르침들이 범람하게 된 것이 소위 비움의 영성에 대한 기독교적 뿌리를 찾기 시작한 것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뭐... 이것은 강의안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라고 볼 수도 있으니 넘어가자.
앞의 ‘고통’의 현실을 인식한 현대인들은 불교와 힌두교의 비움의 가르침들을 찾았지만, 불교와 힌두교를 선택할 수 없는 기독교 청중들에게 이동원 목사는 다행스럽게도 ‘비움의 영성에 대한 기독교적 뿌리’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또 다른 뜻의 ‘다행히도’ 그 전통이 서방 전통에만 의존 한 것이 아닌 동방 전통-기독교 주류(?)의 영성적 전통- 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일단 ‘비움’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더 자세히 나오니 미뤄두기로 하고...
‘전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서방전통’, ‘동방전통’ 하는 것을 보니 서방전통은 로마가톨릭, 동방전통은 러시아정교회를 말하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다행히도’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로마가톨릭 전통에‘만’ 의존 한 것이 아닌 러시아정교회의 전통에‘도’ 의존 했다는 것은 결국 둘 다란 이야기 아닌가... 이동원 목사는 본인이 강의하는 영성이 로마 가톨릭에 의존한 영성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모양이다. 어디로부터 온 ‘전통’이든 그것이 말씀에 근거 하고 있지 않다면 문제가 있을 터. 말씀에 근거하지 않는 전통의 강조는 ‘로마 가톨릭’이나 ‘러시아 정교회’나 사실 다를 바가 없다. 그럼 그 ‘비움의 전통’을 살펴보자.

1. 비움 (kenosis)
  1. 비움의 성경적 근거
     * 빌립보서 2:5~8
          - 예수님의 전 생애 특히, 그의 탄생 (마굿간) 과 삶 (머리둘 곳이 없으심),
            그의 죽음 (십자가와 장사)이  비움의 삶에의 자원적인 화육이었다.
     * 고린도후서 8:9

‘비움의 성경적 근거’에서 예를 든 두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 하시고 고난의 생애를 사셨다는 말씀이다. 일단 빌립보서 말씀을 살펴보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개역개정)“

‘비워’란 말의 뜻을 문맥에서 유추해보자. 왜냐하면 ‘비우다’라는 동사가 ‘물 컵을 비우다’라는 것처럼 그 뜻 그대로 대입되지 않는 문장이니까. 대략 다음 같이 추려보자.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비우시기 전에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비우신 후 예수님은 종의 형체, 즉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즉, 비운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서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버리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이 되셨다.
그럼, 이미 사람인 우리는 무엇을 버린단 말인가? 다음 인용말씀도 함께 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개역개정)”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의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럼 비움이란 것은 예수님이 피 값으로 주신 영생으로 말미암아 얻은 ‘하나님의 자녀’란 신분을 ‘비운’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말씀을 근거로 무엇을 어떻게 비운단 말인가? 계속 살펴보자.

2. 비움 기도의 목회적 실천
        1) 예수 기도 (Jesus Prayer)
          예수 기도의 표준적 형태인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는 6세기경  이집트의 수도자의 책  '사부 빌레몬의 생애'
          에서 처음 발견된다.  7세기경 성요한 클라마쿠스 (John Clamacus)에 의해
          영성적인 기도문으로 추천되었다.  13세기 아토스 성산의 수도자 니케포루스
          (Nicephorus)는 호흡의 리듬을 사용한 몸 기도와 함께 마음을 비우기 위한
          기도로  '예수 기도'를 그의 저서를 통해 강력하게 천거하였다.  그후 시나이의
          그레고리오는 예수 기도에 '죄인'이란 단어를 첨가하여 오늘날의 '예수 기도'의
          정형을 이루었다.   
- "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예수 기도' 의 전통적인 4가지 목적
            -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 그의 사랑을 경험함
            -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민감성의 개발
            - 기도의 반복적인 수행  ("쉬지말고 기도하라")
            - 내적 고요를 실천하는 마음의 집중
      
인터넷에 올라있는 불완전한 강의안만 가지고 살펴보려니 제대로 짚고 가는 건지 모르겠다. 분명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였으니 그것이 예수 기도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강의 하였으리라. ‘비워’,‘가난함’이란 단어가 들어 있는 성경구절을 앞세워 놓고 바로 예수기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뭐 실상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강의안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으니 필자 나름대로 이동원 목사의 ‘비움’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 안에서 유추해 보면, 곧 성화(qU); 하나님의 의해서, 또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요일2:15~1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는(갈5:24) 것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예수기도’가 ‘성화’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먼저 ‘예수기도’, ‘관상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사실 이 부분이 이 강의 비판의 핵심이며, 나아가 레노바레 운동비판의  핵심이다. ‘예수기도, 관상기도’야 말로 레노바레 운동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기도’에 대하여 은성출판사에서 나온 ‘순례자의 길’이란 책에 일부분을 인용해보겠다.

>“혼자 고요히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으라. 부드럽게 숨을 내 쉬면서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상상하라. 그대의 정신, 즉 그대의 생각을 머리로부터 마음으로 옮겨 가라. 숨을 내 쉬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하라. 입술을 가만히 움직이면서 말하든지, 아니면 생각으로 말하라. 다른 생각은 모조리 제쳐 두라. 평안하고 침착하라. 되도록 자주 그 과정을 반복하라.”

또 다른 부분을 보자.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배운 방법대로 마음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내가 이제 말하는 대로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어를 발음하는 기능은 성대에 있다. 모든 생각을 거부하라(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라. 항상 그것을 시행하라. 얼마 동안 그렇게 시행하면, 당신의 마음은 기도에 대해 열릴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동방 정교회의 전통인 ‘예수기도’의 실천 방법이다. 즉 계속 거듭해서 말로 하든지 생각으로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하는 문구를 계속 되풀이 하라는 말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기도의 성경적 근거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딤전2:1)”의 구절을 들고 있다. 즉 우리는 바울이 첫째로 권하고 있는 기도를 해야 하며 또한 쉬지 말고 하는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수행되어져 온- ‘예수기도’ 라는 것이다.

누구나 말씀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기도는 중언부언 하는 기도인가?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언부언의 뜻은 무엇인가? 아멘넷의 김삼 목사의 글 중 일부를 인용해본다.

>해당 성구인 마태복음 6:7의 '중언부언'(그리스어 동사 원형: '바탈로게오')에 관한 (스트롱 자전 945번에 대한) 조셉 헨리 테이어 렉시콘(Thayer's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Coded with Strong's Concordance Numbers)의 같은 항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to stammer. 말을 더듬다
2) to repeat the same things over and over, to use many idle words, to babble, prate. 똑같은 말을 자꾸 되뇌다. 하릴 없는(실없는) 낱말들을 사용하다, 중얼거리다, 수다를 떨다. Some suppose the word derived from Battus, a king of Cyrene, who is said to have stuttered; others from Battus, an author of tedious and wordy poems.

......'바탈라게오'의 가장 중요한 이차적인 뜻은 단순히 똑같은 말을 거듭거듭 되뇐다는 뜻이다...'말을 더듬다'가 일차적 어의라고 해서 이차적 어의가 중요하지 않은 듯한 논리는 단편적이다. 그런데 위의 이차적 어의는 분명히(!) 현재 관상권 일각에서 하는 문구 반복 또는 힌두교나 티� 불교의 만트라와 거의 다름없는 행태를 가리킨다.

김삼 목사가 지적한대로 예수기도의 반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중언부언 하는 기도와 다름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러한 문구 반복은 힌두교와 티� 불교의 만트라와 거의 다름없는 행태라고 밝혔는데 이것에 대한 다른 사람의 글을 또 인용해 보겠다.

>...머튼, 키팅, 그리고 페닝턴, 때로는 포스터도 관상기도 중에 한 단어나 구를 반복하기를 제안하는데 그 단어 또는 구는 “예수, 주님, 아버지, 친구, 또는 예수의 기도”와 같다. 이것은 큰 소리로 또는 마음 속 깊이 반복될 수 있으며 또한 사람이 뭔가 다른 것으로 벗어나게 될 때 돌아가야 할 단어로 사용될 수 있다...
...힌두교, 티벳불교, 초월명상, 그리고 때로는 뉴에이지 명상에서, 만트라라 불리는, 한 단어는 명상가에게 반복하도록 주어진다. 이것은 종종 한 신의 이름 또는 때로는 ‘나는 그거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단순하게는 ‘나는 있다’를 의미하는 구절이다. 이 만트라의 목적은 자기 정화이고 영적 진리들에 대해 열리게 되기 위함이다...
...크리스찬이 되기 전에 오랫 동안 다양한 형태의 동양종교와 뉴에이지 명상을 배우고 연습했던 나는 관상기도 변호자들이 제안한 기법을 사용하여 가벼운 황홀경에 들어갈 수 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뉴에이저나 다른 사람들이 ‘순수한 의식’이라 부르는 상태이며 거기서 사람은 활동적 사고와 판단할 능력으로부터 정지된다. 사실상, 선불교는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이탈하고 판단하기를 중지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위의 글은 마르샤 몬테네그로(Marcia Montenegro)란 사람이 Midwest Christian Outreach 저널에 기고한 글을 ‘아멘넷’의 ‘들풀’이란 분이 요약 번역해서 올린 글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고백한 대로 마르샤는 점성술(학)으로 학위를 받고 점성술과 뉴에이지에 수 십년 동안 빠져있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지금은 기독교인으로 사역하는 사람이다.

아마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이 어디가 비 성경적이냐고. 그리고 기도를 하고 싶고, 또 기도를 하려는 마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냐고. -이것은 동방정교회의 주장이기도 하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그렇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기도, 관상기도’ 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기도인가? 위의 마르샤의 경고를 다시 살펴보자.

>나는 관상기도 변호자들이 제안한 기법을 사용하여 가벼운 황홀경에 들어갈 수 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이 상태는 뉴에이저나 다른 사람들이 ‘순수한 의식’이라 부르는 상태이며 거기서 사람은 활동적 사고와 판단할 능력으로부터 정지된다. 사실상, 선불교는 사람이 마음으로부터 이탈하고 판단하기를 중지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또 이미 인용했던 ‘순례자의 길’의 ‘예수기도’에 대한 부분을 재인용한다.

>단어를 발음하는 기능은 성대에 있다. 모든 생각을 거부하라(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 하라. 항상 그것을 시행하라. 얼마 동안 그렇게 시행하면, 당신의 마음은 기도에 대해 열릴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

필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는가? 마르샤의 글의 다른 부분을 보자.

>키팅(토머스 키팅: 카톨릭 관상 대가. 향심기도/초종교운동 선구자. 시토회/베네딕토회 수사)에 따르면 관상기도는 생각으로부터의 이탈이고 ‘생각비우기’ 상태에 들어가서 모든 생각들 심지어 제일 좋은 생각들까지도 벗어버리는 시간으로 오직 순수한 각성만이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우리가 논리와 지성을 사용하면 성령님은 참견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활동적 사고와 판단할 능력의 정지. 모든 생각을 거부하기. 생각으로부터 이탈하기.
과연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사고 작용을 멈추어야 우리에게 참견하실까? 키팅의 주장처럼? 그렇다면 성경 어디에 그러한 근거를 말씀하고 있는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를 요구하신 것을 나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방언기도, 그리고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너무나 인간적인 기도들... 이것들 중 그 어디에서 무의식의 황홀경 속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던가? 오히려 성경 속에서 그러한 예를 찾는 것이 너무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대로 다른 종교들에서 그러한 예를 찾는 것이 더 쉽지 아니한가?
또 하나 지적되는 것은 경험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순례자의 길’ 인용 끝부분에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그것을 알고 있다.’ 고 말하는 부분을 보라.  그리고 마르샤의 글의 또 다른 부분을 보라.

>포스터(레노바레 창시자)는 관상기도 선생들과 신비주의자들로부터 많이 인용한다. 문제 많은 진술들도 있는데, “영적 실체를 향한 경험적 자세를 취합시다”,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한다면 어떤 일들은 역사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이라고 기도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들이다. 그는 기도할 때 결과들을 초래하기 위해서 시각화 기법을 이용하는 것을 변호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은 여성 신격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남성 신격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렇게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마24:24~2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마12:39)”

포스터가 말했다는 저 이상한 진술들은 굳이 비판할 가치가 느껴지지 않으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상 관상기도의 문제점들을 짚어보았다. 정리하자면 첫째, 그것이 중언부언하는 주님이 금하신 이방인의 기도라는 것. 둘째, 성령의 뜻을 좇지 않는 무의식중의 신비주의적인 경험을 구하는 기도라는 것. 셋째, 행태가 동양적 수행법과 ‘같다’ 는 것. 즉 행위로 구원에, 인간이 신이 되는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필자는 여기에서 사탄의 섬뜩한 유혹을 느낀다. 필자가 지금 인용하고 있는 “순례자의 길”과 마르샤의 글의 또 다른 부분들을 비교해 보겠다.

>‘예수기도’는 영적인 광신자들, 새로운 만다라를 찾고 있는 사람들, 혹은 최근의 은사 운동의 열풍에 전율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순례자의 영적인 길이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순례자의 자기 훈련은 영원한 생명책안에 좋은 성적을 축적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의 길을 추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현대는 경험을 통한 습득을 중요시하는 시대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기적을 일으키시지만 우리 스스로도 어느 정도 애써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순례자에게서 배우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순례자의 길’ 서문(앤드류 워커)

> 신비주의자들과 관상기도의 명상적 훈련의 수행자들에 따르면, 관상가는 신비주의자가 접촉하는 것과 같은 실체와 접촉한다고 진술하며 또한 관상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하고 직접적인 비전을 받는 것으로 느낀다고 진술한다. 이 생각은 동양종교적 명상기법들을 통해 ‘생각비우기’ 상태에서 좀 더 순수한 형태의 진리를 얻는다고 가르치는 동양종교의 믿음에서 발견된다.
페닝턴은 ‘위대한 요기(Yogi) 스와미 사치다난다지’에 대한 존경과 ‘진정한 지혜를 찾아’ 한 힌두 스와미 아래서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간 미국 교수에 대한 승인에 대해 글을 썼다. 그는 대부분의 힌두인들에게 예수는 한 하나님의 많은 현현 중의 하나일 뿐이며 각 사람은 각자 자신의 선택된 신성 또는 하나님의 현현을 가질 자격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예수는 서양사람을 위한 현현일 뿐이라고 한다. 페닝턴은 머튼과 다른 한 사람이 관상기도와 ‘수피 명상과 기도’의 동일함을 보았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이 초월명상에 참여하기를 승인한다. 또한 그는 아무 사람도, 즉 비기독교인도 관상기도를 배울 수 있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며 관상기도를 어느 누구와 나누는 것에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양으로부터 심하게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관상기도 선생은 토마스 머튼이다. 그는 대단한 지성을 가졌고 이것은 그의 저작물을 보면 명백하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에서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에 대해 글을 썼는데 그는 달라이 라마와의 영적인 결합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티벳불교도들과 함께 명상 개념들과 카톨릭 수사들의 방법 사이의 동일한 점들을 발견했다고 진술했으며 심지어 그는 한 티벳불교 명상 센터를 미국에 세우는 것을 논하였다. 그는 또한 티벳불교의 지도자인 초기암 트룽파를 지혜롭고 진정한 영적 대가라고 불렀다...

한쪽에서는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부분이 ‘아니다’ 라고 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다른 종교의 구도적 영성을 적극 수용, 아니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그들과 함께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자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까지 읽은 분 중에 필자가 말하는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동원목사가 말하는 관상기도가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손꼽히는 복음주의 설교가로 널리 알려진 이동원 목사는 다른 종교의 영성을 차용하는 분이 아닐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동원 목사는 어디에서 관상기도를 배워왔는지 밝혀보겠다.
아멘넷의 김삼목사의 칼럼을 인용한다.

>이동원 목사는 '관상과 행동의 미학'(2002년 8월3일)이란 칼럼에서 그 해 7월 유학생
 수련회 '코스타'와 워싱턴 지구촌교회(김만풍 목사)와의 교차사역 후, 1주동안
볼티모어 근교의 '성삼위일체 수도원'에서 '샬렘 인스티튜트'의 영성지도를 따라 부부
가 함께 관상기도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이동원 부부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샬렘 인스티튜트(www.shalem.org)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샬렘 인스티튜트가 실시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필자의 눈을 의심케 한다.

지난해(2006년) 11월4일 메릴랜드 세인트마크장로교회에서 실시한 프로그램의
제목은 '관상 실천으로서의 선(;, zen)-정의의 길'. 프로그램 소개문엔 일본 불승
바수이 토쿠쇼의 말까지 곁들였다.
"그대의 참 본성을 깨우칠 때..그대의 많은 고유의 덕목들을 나타내고
남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삶에 혜택을 주게 된다."

명색이 '장로교회'인 이 장소에서의 �샵은 선불교(zen buddhism)의 관상을 소개하고
 참여자들 전원이 가부좌 자세로 좌선 실습, 걷기 명상을 한 뒤,
"선(;)이 우리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온정적 행위를 구현할 수 있는 한 삶의 길을
보충해 줄 수" 있음을 배운 과정이었다. '선(;)과 하나님'이라..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불교의 자연신과 별 다름 없음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소개문은 또 카톨릭 사제인 라벗 케네디의 책, '선 정신, 기독교 정신: 기독교 삶에서
의 선(;)의 위치'에서 다음 글을 인용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스승 아래서의 선(;) 실천이 기독교 삶에 결합될 수 있음을
체험했다.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 체험을 심화시키고 우리의 신심을 우리의
머리만이 아닌 우리의 전인에 뿌리박게 해 줄 수 있다."

이 홍보문은 "우리 다함께, 이 선의 요소를 통해 그런 결속을 기르도록 힘써 봅시다."
로 매듭짓고 있다. 독자는 무심코 읽을지 모르지만 필자는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불교식 좌선을 하면, 불도의 영이 속에 찾아들기 때문이다.
그 영이 성령이 보내시는 선한 영인가? 아니면 뭐겠는가?  

그런데도 이동원 목사 부부는 바로 이런 단체의 '영성 지도'를 따라
'경건한' 휴가를 보낸 것이다.
이 목사는 이 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보낸 시간의 정적이 태고의 고요 속에
영혼의 평안을 회복시켜 줬고, 주변의 모든 낯선 얼굴들이 넉넉한 우정의 샘물이
됐다고 미사여구를 동원해가며 한껏 관상 홍보(?)를 했다. ....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셨을 줄로 안다. 그 기도가 그 기도이다. 레노바레에 적을 두고 있는 이동원 목사인데 어찌 다르겠는가?

필자는 서두에 올바른 물음에서 올바른 답이 나온다는 말을 언급한 바 있다. 이동원 목사도   언급했다시피 그가 제시하고 있는 해결책은 그저 불교, 도교, 힌두교 등 에서 쓰이는 명상법일 뿐이다. 말씀을 근거로 제시한들 어쩌겠는가? 성경의 어떤 곳에서도 관상영성을 지지해주지 않는데... 혹, 이러한 명상의 방법은 중립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성 훈련에 도입할 수 있다고 변명할런지도 모르겠다. 과연 중립적인 방법인가? 앞서 마르샤의 글에서 설명하다시피  이러한 명상법 뒤에 전제된 세계관과 그 방법은 지극히 비성경적이며 또한 위험하다.
영성, 영성 하는데, 도대체 영성이란 것이 무엇인가? 
어렵게 따져볼 것 없이 복음을 생각해보자. 그 유식했던 사도바울이 모든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을 아는 것을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영은 죽은 상태였다.(롬5:12,...)
죽었던 우리의 영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롬5:18...)
즉,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는 죽은 영이다. 죽은 영에게 어떻게 영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죽은 영성이다. 참된 영성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은 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 바로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관상가들을 보자. 마르샤의 글에 언급되었던 가톨릭 수사들이나 외국인 관상가들 말고 이 강의를 하는 이동원 목사를 보자. 그는 어디서 관상을 배워왔는가?

선불교에 참된 영성이 있겠는가? 예수가 없는데?
힌두교에 참된 영성이 있겠는가? 예수가 없는데?
그럼 가톨릭에는 참된 영성이 있는가? 예수가 있으니까?
가톨릭은 관상기도가 있었던 저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 은혜의 복음대신 신을 찾아가는 구도적 영성으로 바뀐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해 부정해온지 오래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이미 우리의 구원자이시요 오직 한길 이신 그 예수님이 아니다. 가톨릭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뤄두겠다.

관상기도에 대해서는 정말 이것 외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너무 길어졌고 또 남은 강의안들도 살펴보아야 하기에 여기서 줄이기로 하겠다. 부디 읽는 모든 분들이 관상기도의 위험성을 가슴깊이 느끼셨기를 바란다. 그럼 강의를 계속 살펴보자.

         2) 세족식  - "이웃을 섬기시고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예수"
        3) 성찬식  - "몸을 깨트리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
                  헨리 나우엔의 성찬 이해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선택받은 자 ~ 축복받은  ~ 깨어진 자 ~ 나누는 자
                        (took ~ blessed ~ broke ~ gave)
     3. 비움의 영성적 실천
      1)  '관조(관상)의 기도'  (Comtemplative prayer)로 주님 만을 바라보기
      2)  이웃 사랑을 위한 자발적인 가난
         * 고린도후서 8:9 / 8:14 비교하기  (8:1~2)
           <잠시 조용한 곳에서 롬 1:28~32 과 갈 5:19~21 을 읽고 내가 비우고 버려야
            할 육체의 욕심들이 무엇인가를 기록하도록 하라.>

세족식과 성찬식을 목회적 실천 사항에 넣고 있는데 ‘이웃을 섬기시고자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예수“라... 비운다는 표현은 맨 처음에 인용한 성구인 빌립보서 말씀 이외에는 한글 성경(개역한글, 개정)에는 보이지 않는다. 앞에서 지적했다시피 ’비움‘의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그 밑에 ’헨리 나우엔의 성찬 이해‘라는 부분은 필자가 그의 글을 읽어보지 못해서 무슨 내용인지 소상히 알지 못하지만 그 밑의 부분이 아마 그 내용의 요약이 아닌가 싶다.
’선택받은 자~ 축복받은 자~깨어진 자~ 나누는 자‘.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지만 정보가 부족하기에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다만 ’헨리 나우엔‘이란 사람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밝히고 간다. 그에 대해선 워낙 널리 알려져 있고 자료도 많으므로 굳이 여기서 들추어내지는 않겠다. 

이웃사랑을 위한 자발적 가난이라...비움의 영성적 실천으로 이웃사랑을 위한 가난이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비우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 부분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이 강의에서 정말 성경적이라고 생각되는 유일한 부분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고 버려야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육체의 욕심을 적어보라는 이 끝의 적용부분이다. 이렇게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으로 충분한데 왜 이교도적 영성훈련의 실천을 전파하는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2. 채움 (Pleros)
      1.채움의 성경적 근거
          * 요한복음 1:14
          * 에베소서 3: 18~ 19 (4:13,  5:18)
          * 골로새서 2: 9~ 10
      2. 채움의 필요성
         - 지속적 비움의 위험성 (눅 11:24~26)
       3.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1) 하나님의 임재  (시 62:1~2, 5~6)
                - "God alone"
           2) 성령의 충만  (엡 5:18)
          3) 성령의 열매  (갈 5:22~23,  빌 4:8)

 


지속적 비움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명상가, 관상가들 뿐만 아니라 단전호흡, 기공수련자들도 저런 상태의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히 해줘야 할 말을 하는 것일 게다. 그것 보다 ‘채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걸린다. ‘Pleros'라는 단어의 원뜻은 필자는 솔직히 잘 모르겠고 어느 말씀에 나온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위의 성경적 근거로 제시된 성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충만‘이라는 단어이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위의 채움의 성경적 근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질문이다.

’3.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누가? 누가 무엇으로 채우는 것인가? 내가 채우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충만케 해주시는 것인가? 근거로 들고 있는 성구들 중에 ‘내가’ 채우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 있는지 살펴보자.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니 넘어가고 에베소서부터 보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에베소서의 다른 말씀도 보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

이 부분 만 가지고는 헤아리기 어렵다.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며 헤아려보자.

“4::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 내리셨던 예수님이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것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다.

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사람들을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도자로, 목사로, 교사로 삼으신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주의 은혜로 아들을 믿게 되었으며 알게 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이루시고(12절을 보라),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게 하시리니(12절을 보라) 이는 우리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에 빠져 요동치 않게 하려 하심이다.

역시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자라게 하시는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성구가 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 이니라(고전3:7)”

마지막 에베소서 5장 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받으라!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시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충만하여졌으니.’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충만하게 해주신 것이다.

또 반복하지만 올바른 질문에서 올바른 해답이 나오는 것이다. 무엇으로 채우다니? 채워주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우리는 바울이 간구했던 대로 채워주시기를 기도할 뿐이다. 강의안에 다윗의 기도 시편 62편을 근거로 들어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라고 한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내 속에 갖다 채운단 말인가? 다윗의 기도 중에 그런 오만함이 느껴지는 부분이 도대체 어디인가?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성령충만 역시 내가 채우는 것이 아닌 구하는 것임을 이미 지적했고, 성령의 열매도 역시 마찬 가지이다. 성령을 따라서 행할 때 (갈5:16)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이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님을 잊어선 안된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이시다. 성령충만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도 내 마음대로 내 속에 혹은 내 삶에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  비움과 채움의 순환적 역동성
         1.  교리적 체험의 '통시성' (synchronism)
          * 그리스도의 죽음 - 비움의 근거
          * 그리스도의 부활 - 채움의 근거
          <묵상.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수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확신한 성도는
            새로운 삶의 승리를 위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
  
2. 비움과 채움의 적용을 위한 선결 이해
          1) 비움과 채움은 대체로 시간적이다.
          2) 비움과 채움은 동시적일 수 있다.
          3) 비움과 채움은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실천이어야 한다.
           <적용과 실천>
          1. 들숨과 날숨 (호흡) 기도로 비움과 채움을 수행한다.
          2. 매일의 경건 실천으로 비울 것과 채울 것을 점검한다.
          3. 성령 충만을 위한 기도를 생활화 한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은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의 채움을
                  갈망하셨기 때문이다."
              "Let Go  -  Let God"

‘비움과 채움의 순환적 역동성’의 부분은 앞의 내용이 반복 될 것 같으므로 넘어가겠다. ‘순환적 역동성’이라... 동양적 세계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목이다.
이 강의 전체의 적용과 실천으로 이번에는 호흡기도를 말하고 있는데 앞의 지적한 관상기도, 예수기도와 마찬가지 이므로 역시 넘어가겠다. ‘수행한다.’는 동사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매일 경건의 실천으로 비울 것과 채울 것을 점검한다...’
필자는 성경의 원문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국어사전을 펼칠 수 밖에 없다... ‘경건’의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함.’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경건과 큰 차이가 없는 듯 하다. ‘하나님께서 항상 옆에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 이것이 경건일 것이다. 아마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라보시고 책망하실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경건이다. 우리가 집의 어른을 공경할 때 그러한 마음이지 않는가? 어른께 예의상 누를 범하지 않으려 하며 그 뜻에 순종하려 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보자. ‘매일의 경건을 실천하여 비울 것과 채울 것을 점검’이라...
다음 인용글을 보면 필자가 왜 이 부분을 짚고 있는 지 이해가 갈 것이다.

>대부분의 동양적 명상들이 취하는 방법은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는 내성법(introspection)과 어떤 한 물체나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집중법(concentration)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내성(�o)은 때때로 매우 유용할 수 있고 일반은총적인 면도 있다. 사실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내적인 성찰을 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성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고 위선적인지 새삼스럽게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동양적 수행법이 제공하는 자기 관조를 통해서도 우리는 소위 사영리(��)에서 말하는 두 번째 영리까지는 지식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불신자들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극구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내성을 통해서 지식적으로 그 사실에 동의한다. 그것은 자기 관조를 통한 정신적 발견이지 성령의 조명에 의한 영적 회심은 아니다....물론 이것은 테크니컬한 감정증폭의 기술에 의해서 참회의 눈물과 자아의 해방감, 환희를 일시적으로 가져다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명상법은 자기 의식이 조작해낸 것을 경험하는 것이지 성령이 주시는 체험은 아니다. -죠이 선교회 출판 ‘세계관을 분별하라(안점식지음)’

과연 이동원 목사가 말하는 매일의 경건은 자기 관조인가 성령의 조명을 받음인가?
“네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래. 관상 기도의 깊은 맛을 경험해 보면 이런 소리 못할 거야.”라고 말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분들께 미안하지만 필자는 관상기도를 직접 적용해본 경험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것도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갈급함에 이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경건의 연습이다.’ 라는 확신에 가득 차서 ‘기도’에 임했다. 방법도 다양하게 경험했다. 처음에는 예수기도로 시작했고 점차 침묵기도로 나중에는 호흡기도를 주로 많이 했다. 유명한 베스트 셀러인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나오는 수사의 영적상태는 나의 갈망이자 꿈이었다. 물론 평안함도 얻었고 유익도 있었다.
그러나 그 평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번번히 나의 ‘기도’를 방해했고 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잃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결국 내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기도를, ‘쉬지 않는 기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한때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또 깨닫게 된 것은 어느 샌가 나 자신을 자체 평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루 동안 얼마나 그 ‘기도의 상태‘에 있었는지가 내 삶의 평가지표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행위의 탑을 쌓고 있었다. 탑이 높게 쌓이면 만족과 교만이 임했고 실패한 날에는 불만족이 임했다. 나는 에녹처럼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지’에 이르길 갈망했다.

>동양적  명상법은 궁극적으로 정체성의 상실을 통한 무의식 상태를 추구하고 결과적으로 사단이 제공하는 황홀경과 같은 체험을 가진다. 이러한 종류의 쾌락은 성령충만의 상태에서 누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성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동양적 명상법은 무의식의 상태, 변형된 의식의 상태로 가는 것이라면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의식 안에서 각인되고 명료화되는 과정이다.
동양적 명상법이 자기 내부에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면 성경적 묵상은 하나님께 의식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동양적 명상법은 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성경적 묵상은 신에게 항복하는 과정이다.
성경적 묵상은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나의 육신적 욕구는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동양적 명상법은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나의 육신적 욕구는 영적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이것은 세상적 차원에서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일이다...
-죠이선교회출판 ‘세계관을 분별하라’ (안점식지음)-

필자가 관상영성 훈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저렇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어떤 것보다도 부패한 사람의 마음으로 사단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이 멸망당할 세상에서 죽은 후에야 누릴 천국의 영화를 ‘구했으니’ 어찌 잘못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권에 대해 이미 이야기 하지 않았나?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요 그분이 우리를 먼저 찾으신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데려가실 곳이다. 우리 안에 천국 소망이 있는 것이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은 아니다. 천국의 약속이 주어진 것이지 이곳에서 천국을 찾아 나서라는 말씀이 아니다.
바른 질문이 바른 답을 낳는다. 천국을. 신을 찾아나서는 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 하는 짓이다. 그곳에서 그 방법으로 쓰인 것이 관상영성이다. 이미 천국약속을 받고 성령님이 내주해 계신 신자에게 그것은 배설물과 같이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적 영성은 무엇인가?
관상기도를 비판하며 언급했다시피 성경적 영성의 출발은 복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성화의 사역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예수님은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을 보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3~14)“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의 역사하심은 예수님의 사역과 같다.
그분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고(요5:30), 장래 일을 알리시며(마24장, 계시록),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신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1:11)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4~15)

모든 것의 출발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광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신 것이다. 이 복음을 믿는 이들, 주 예수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은혜와 사랑이 넘치도록 풍성하다. 그들에게만이 성령님을 통해 온전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사랑이 주어지며 온전한 선행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겸손하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그저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자가 믿고 있는 성경적 영성, 예수님을 닮은 삶이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구원과 성화를 너무나 분리시켜 생각해왔다. 일단 예수 믿었으니 구원은 받았고 이제 성경말씀을 실천하면서 성스럽게 살아보자 라고 생각해왔다. 아니다! 온전한 성화의 시작은 복음, 나대신 죄 값을 치르시고 이 죄인을 구원하신 그 은혜,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요(요3:5)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그 복음을 믿음으로서 성령님께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온전한 사랑을 선물로 받아 행하는 것이다.(딤전1:5) 이것이 중생이요(요3:5) 새사람이요(골3:10) 거듭남(벧전1:23)이다. 그리고 이 것은 우리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 완성되어진다.(눅23:43, 살전4:16-18) 항상 주와 함께 있는 영화는 멸망당할 이 세상이 아니란 말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뜨거운 첫사랑을 경험하다가 식은 신자들이 있다. 또 오래된 신앙생활 속에 무디어져서 말씀의 감격이 사라진지 오래된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관상기도와 같은 구도적 영성은 상당히 매혹적이다. 무언가 새로운 체험을 동반하며 평안함의 만족감도 주고 그동안 중단 되고, 제자리를 맴돌아왔던 지리한 성화의 과정이 새로이 촉진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시작이 틀렸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복음이다. 예수님이다. 그곳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요 끝, 알파와 오메가 이시다.

출처 : HolyArmy의 블로그
글쓴이 : HolyArmy 원글보기
메모 :

'신학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감히 기름 부음을 받은 주의 종을 대적해! (펌)  (0) 2008.05.10
나열식 설교  (0) 2007.11.13
향심기도?  (0) 2007.11.12
심각한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0) 2007.11.12
피터 와그너  (0) 2007.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