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스크랩] 웨슬리의 관용정신

undertree 2006. 10. 21. 22:39

2006 전덕기 축제에  한마음이라는 주제하에 열리는 학술제에 참가할 웨슬리학회 원고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 아니 그 누구라도 한마음이기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복음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던 웨슬리 목사님의 정신에 따라 살아간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 같다....

 

 

웨슬리의 관용 정신(Catholic spirit)에 대한 고찰

 

                           웨슬리신학회  Th.M. 6/6학기  홍  미 선



  가톨릭(Catholic)이라 하면 보통 로마 가톨릭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며, 가톨릭(Catholic)이라 함은 ‘일치’,‘관용’을 의미한다. 본래 웨슬리는 새로운 교회나 교파를 만들려 하지 않고, 메토디스트 운동을 통해 영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완하여 좀 더 좋은 교회를 만들려는 교회갱신운동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웨슬리의 일치 정신, 관용 정신은 왕하 10:151)을 본문으로 한 “관용의 정신(Catholic Spirit)”이라는 그의 설교2)를 통해 잘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때 장애가 되는 서로간의 의견의 불일치는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아감에 있어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해야 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받을 만 한 사람 뿐 아니라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 5:46),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 하느니라”(누가복음 6:3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들에게 사랑의 빚이 있어서 그 사랑을 갚은 것도 아니요, 우리 인간들이 사랑 받을 만 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리가 받은 그러한 사랑을 이웃을 향해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3)


  그런데 이러한 진리가 옳음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 같지 않다는 것과 그 결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의견이나 감정의 차이만큼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차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본래 모든 교회는 하나의 교회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감리회가 “교회의 기존 테두리에 머물면서 같은 교리, 목회, 성례 및 예배에서 일치하기를 바랐다.”4) 그래서 그는 ‘원죄’, ‘믿음에 의한 칭의’, ‘마음과 생활의 성결’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의 교회로 함께 증거 할 수 있다고 했다. 웨슬리는 성경적이고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교리에 일치하는 한, 어떤 교회나 신학사상에도 관용적이다. 단지 의견 상의 문제라면, 어떠한 의견의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치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설교를 통해 교회 일치에 대한 염원을 강조하고 있다.5)


  비록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외적 일치를 방해할지라도, 또 작은 의견의 차이점들이 있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왕하 10:15에 나오는 예후와 여호나답과 같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각기 독특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유한한 인간은 모든 것에 대해 ‘부분적으로’ 밖에 알 수 없고, 그로 인해 삶이나 종교에 대해 각양각색의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그가 가진 모든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잘못되어 있을 수 있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이 잘못하고서도 잘못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의 무지가 어디까지인지 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타인에게 자신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사랑의 마음으로 연합하려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이러한 Catholic spirit(관용 정신)으로 교리와 체제, 의견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교회의 본래 목적과 존재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 각각의 상이한 모든 교리와 체제를 초월하여 하나가 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웨슬리는 생전에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렇게 웨슬리는 교회일치에 대한 관용 정신을 주장했지만, 일치를 원한다고 해서 진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진리를 포기하고 일치를 바라는 것은 일치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분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웨슬리는 생각했다. 잘못된 의견이나 우상적 예배 형식까지도 참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도 않고 성례가 적절하게 집행되지 않을 때는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 줄 수 없다는 것이다.6)


  이렇듯 관용 정신에 대한 오해의 소지와 잘못된 적용이 있을 수 있기에, 웨슬리는 설교 “관용의 정신(Catholic Spirit)”을 통해 그 부분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갔다.


  웨슬리는 먼저 관용 정신은 ‘이론적인 절충주의’가 아니라고 했다. 절충주의는 진정한 일치주의와는 완전히 다른데, 진정한 관용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태양이 확고한 것처럼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원리에 대해 확고한 주장을 가진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확고히 하고나서 관용 정신을 가질 것을 제안한다. 이는 관용 정신을 갖는다는 미명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주장과 혼합시키지 말라는 주장이다.7)

  

   인류는 예로부터 다종교적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기독교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진리의 유일성을 주장해왔다. 그래서 기독교, 그리스도교인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한 세계도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였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에베소에도 많은 신들과 섬기는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말했던 것이다. 초대 교회가 생긴 후 처음 300년은 제설(諸說) 혼합주의(syncretism)의 유혹과 죽느냐 사느냐의 치열한 투쟁을 벌인 기간이었다. 따라서 다종교적 상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8)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시대사조가 지배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1960년대 주로 미국에서 출발한 미술, 건축, 문학, 음악, 무용, 과학, 기술 등의 영역에서 서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나타나기 시작한 일련의 방향으로 그 정의가 분명치 않다. “해체주의”, “탈현대주의”라 불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 진리에 대한 부정, 과학의 일방성에 대한 거부, 거대담론에 대한 거절, 자아와 객관적 세계상에 대한 거부, 거대담론에 대한 거절, 자아와 객관적 세계상에 대한 확신의 붕괴, 권위와 전문성에 대한 배타, 진정성에 대한 탐구의 거부, 다양성에 대한 수용과 감각적 경험의 향유”를 특징으로 한다.9)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실한 모든 것에 대해 거부하고, 병렬적이며 다원적이며, 존재의 의미 보다는 작용과 행위, 참여를 강조한다. 이러한 시대사조의 흐름은 종교분야에 있어서도 ‘다종교 공존’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를 촉진시켰다.


  기독교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다원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와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타 종교인들에게 자신의 고유성을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여 1980년대 이후 신학계에 등장한 것이 기독교 종교 신학(the theology of religious)이다. 이 중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종교 신학을 전하는 일부 학자들 - J. Hick, R. Panikkar, Paul F. Knitter 등- 은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타종교의 구원적 가치를 그리스도교와 동일한 수준까지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인류에게 유일하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인가?” 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에 대해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회성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길이 아니며, 제 종교 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또 다른 그리스도가 각기 존재하며, 따라서 모든 종교는 진리와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커스 보그(Marcus Borg)는 “나는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든지, 성서가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라든지, 혹은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c Crossan)은 좀 더 적극적인 견해를 피력하여 어느 종교도 거룩한 것, 신성한 것, 혹은 신적인 것에 대한 독점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다원주의의 수용은 불가피하다고 했다.10) 이는 기독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타종교에 있어 가장 거리낌이 되는 기독교 신앙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또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는데, 오늘 우리는 이것이 어째서 참인지를 밝혀야 한다. 예수님께서 만일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또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주장은 거짓이 되는 것은 물론, 기독교는 사기요 그것이 유대교나 다른 종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더 이상 기독교는 아니다.

 

  웨슬리의 관용 정신에 따른 일치 즉, 교리와 체제와 의견이 다르더라도 일치되어 나가기를 원함에 있어 그 대상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이 같다는 전제 하에 여러 가지 의견을 수용하여 하나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자는 것이다. 여러 가지 신앙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나와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도 협력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11) 하지만 이 말이 공동추구를 위해 또는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 신학자인 존 힉은 성육신의 교리는 신화라고 한다. 또 레이문도 파니카는 예수는 많은 그리스도 중 하나라고 하며, 폴 니터는 예수의 유일회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모든 종교에 동일하게 있다고 주장을 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궁극적 실재가 온 우주의 존재 원인이라고 생각하며, 에베레스트 산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 중심의 다원주의가 손잡은 해방신학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바른 믿음이 아니라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한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천도 중요하지만, 진리가 없는 실천이 과연 무엇을 위한 실천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열심히 가는 것 보다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라 명하신 것은, 타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진리가 있으니 타종교를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고루 비취시므로 그들이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웨슬리는 교회일치에 대한 관용 정신을 주장했지만, 일치를 원한다고 해서 진리를 포기하는 것은 일치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관용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독교 교리의 중요한 원리에 대해서는 확고한 주장을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복음의 진리를 토대로 한 관용이야말로 진정한 관용인데, 이는 관용 정신을 갖는다는 미명 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주장과 혼합시키지 말라는 주장이다. 그래서 웨슬리의 관용 정신은 복음적 에큐메니즘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렇듯 진리의 중요성,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웨슬리의 관용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적용시킬 때, 이 시대 기독교 정체성을 위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혼란케 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에는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다른 종교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함께 손잡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 사업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웨슬리는 이러한 관용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이 누리는 은총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일 줄 아는 사람인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 친구로서, 주 안에서 한 형제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 참여자로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비록 주장이나 견해가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 존재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겸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웨슬리가 1733년 자신과 Holy Club 회원들을 위해 출판한 「기도집」에 다음과 같은 기도가 있다.12) “겸손의 영을 우리에게 주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말게 하옵소서.”13)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가 사랑하기 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은 낮아짐의 사랑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의 협성인으로서 협성에 속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에서 심각한 분열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물론 어느 조직체에서든 이런 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선포하는 공동체에서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함은 협성의 작은 조각으로서 매우 슬픈 현실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이미 하나 된 자들로서,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닌 공동체적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다. 웨슬리는 비록 의견이 한 가지로 통일되지는 못한다 해도 하나님 안에서 마음은 하나로 될 수 없겠냐고 호소하고 있다. 웨슬리는 설교에서 오늘날도 많은 선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여호나답 만큼이나 독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할 때부터 그랬고,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는 때까지’그러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웨슬리는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따르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자신과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면서 연합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14)

  

  오늘 저는 전덕기 축제를 기해 ‘하나됨’이라는 주제 아래 함께 모인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 협성인들이 이러한 웨슬리의 ‘관용 정신’, ‘일치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간곡한 호소를 기억하기 원한다. 복음의 진리를 제외하고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사랑해야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이라는 것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아멘.




참고문헌


김영선, “웨슬리 신학과 한국교회 갱신”, 「제 1회 한국웨슬리학회 학술 심포지움 자료집」, 서울: 한국웨슬리학회, 1999.

김영선, "종교다원주의와 종교 간의 대화". 「협성신학논단」제 7집, 서울: 협성대학교. 2005 

김진두, 「웨슬리의 실천신학」, 서울: 도서출판 진흥, 2000.

이문균, 「포스트모더니즘과 그리스도교 신학」, 경기: 대한기독교서회, 2000.

한국웨슬리학회편,「웨슬리 설교전집 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Colin Williams, 이계준역, 「존 웨슬리의 신학」, 서울: 전망사, 1990.

John Domino Crossan. 한인철역, 「예수는 누구인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7.

Lesslie Newbigin, 허성식역,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울: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3.

출처 : No Other Name!!
글쓴이 : 헤세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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